동양 상고사는 한국이나 몽고, 만주같이 중국 황실에 밉보였던 측의 입장에서 보면, 듣기 거북한 문구로 표현한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은밀하게 숨겨 놓은 사료를 찾아야 하니 이는 현대 용어로 표현하면, ‘과학적 수사학(forensic science) 보고서’와 유사하다고 봅니다. 제가 여기서 보여드리는 보고서는 법의학(forensic medicine)이라는 이름을 본떠서 이름을 붙인다면 역사 수사 평론서(Forensic Historiography)라 부르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한자에는 감정마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양 역사 기록은 메마른 보고서가 아니라, 새로운 미술품을 놓고 여러 미술 평론가들이 나름대로 평하듯, 또는 어느 시화전에 다녀와서 작성한 ‘시화 감상문’과 같이 정확한 답이 나올 수 없는 성질의 학문이 한국 상고사 연구입니다. --- pp.10-11
산서성에서부터 만주 땅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을 중국 기록에는 발조선(發朝鮮), 기조선(GyiJoseon ?朝鮮)이라 했고, 그 후손들이 먼 훗날에 그곳에서 글안을 세워 글안 문자를 남겼습니다. 서쪽으로 옮겨간 고조선의 자손이 세운 나라가 서하 또는 대하 제국(大夏,Tengut Empire, 1038?1227년)이고, 그들이 남긴 글자가 서하 문자(西夏文字, Tengut Script)입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여러 제후국들의 글자 꼴이 달랐다지 않아요? 그 이유는 하우씨의 후손이 남긴 한자와 유사한 글자 꼴은 진시황의 영역 밖에서 독자적으로 옛부터 전해 오던 조자법에 따라 새로운 글자를 더 만들어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 p.35
기원전 2세기까지 대흥안령을 주축으로 내몽고와 만주 서쪽 일대에 걸치는 방대한 지역에 있던 정치 집단을 동호(東胡, 古朝鮮, 發朝鮮, ?朝鮮, 濊貊朝鮮)라 합니다. 그 지역에서 홍산 문화(紅山文化)라 부르는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의 남쪽에는 황하 문화권의 문자가 사용되었고, 중원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황하 문화권에서 난을 피하여 홍산문하(紅山文化)권으로 옮겨 와 살았습니다. 그들이 고조선 땅에 살면서 남북이 서로 교류를 했습니다. 화폐를 썼다고 봅니다. 고조선의 전성기에 쓰였던 화폐가 그들의 상징인 칼을 본따 만든 도전(刀錢)이고, 그 주물에 남아 있는 글자가 고조선에서 쓰던 글자라 봅니다. --- p.45
중국 문헌에 왕검(王儉) 65)이란 이름을 여기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북쪽에 있던 진(晉)조가 남쪽으로 옮겨 온 이후에는 왕검에 관한 기록을 포함한 모든 북쪽 기록은 가짜라 하여 볼 수 없지만, 왕검에 관한 사부 목록뿐이고 성명도 없지만, 총명한 하우씨의 후손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중원 북쪽에서는 왕검(王儉)이란 호칭이 위진시대(魏晉時代)까지도 사용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삼국유사》와 중국 기록을 종합해 보면, 하우씨가 고조선의 왕검입니다. 우(禹)가 모든 ‘소 우는 소리로 기록되던 부족장’의 추천을 받아 최고 집권자, 왕검(王儉)이 되어서 만들었다는 정(鼎)은 유목민의 필수품이었던 동복(銅?), 즉 가마솥을 뜻한다고 봅니다. --- p.69
흔히들 부르는 “거란, 기탄, 글안”의 정체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부터가 모호하여 논문을 쓰다 보니 중원의 남쪽 사람들이 북쪽 역사를 “조직적으로 은폐해 온 증거”가 여기저기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한무제(漢武帝, 기원전 156-87년)가 영토를 넓혀 이를 수용하기 위해 사전을 만들었던 사회적 여건이 남북조시대에는 중원 세력이 북방 세력에 밀리면서 음운학(音韻學, Phonology)이라는 명분 아래 《광운(廣韻)》을 만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깊이 살펴보면, 그 전부터 써오던 《절운(切韻)》과는 다른 점이 많아, 옛것에 새로 만든 글자를 더했다기보다는 많은 낱말을 새로 만들어 전혀 다른 ‘새로운 사전’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서쪽과 북쪽에 살던 적대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쓰던 말을 한자로 적을수 있도록 많은 글자를 만들면서, 비하하는 뜻을 새로 만든 글자 속에 심었습니다. --- p.74
《삼국사기》는 중국 문헌에서 단군을 선인(仙人)이라 한 낱말을 그대로 인용하였듯이 유교 경전에 실린 예(禮)자를 인용하여 단군을 예(禮)자로 기록했습니다. 8) 백제의 첫 도읍지였던 위례성(慰禮城)은 옛적에 어느 “예군(禮君, 壇君)이 살던 곳”이란 뜻으로 심양에서 대련에 이르는 요동반도 서남쪽에 있었어야 합니다. 태백산(太白山)이라는 글자가 눈으로 덮인 제일 높은 산이란 뜻으로, 알타이산맥에 있는 천산(天山, Tengri Mountan, KhanTengri)을 의미합니다. 그곳에서부터 천산북로를 따라 돈황을 지나 관중분지 하동에 있는 해지 북쪽 연안에 자리를 잡고 단군조선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여러 곳에 있습니다. --- pp.147-148
공자께서 말씀하신 “승부부어해 乘?浮於海”라 한 문구의 뜻을 새겨 보면 요동만을 바로 질러 건너 남만주 또는 한반도로 간다는 뜻이 아니라, 발해만 서쪽 해안선을 따라 만주와 교역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갈석산에서 진시황에게 바닷속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진시황이 명했다는 기록이지 않아요? 신선이 살았다고 하는 세 섬은 산동반도 북쪽 해안에 있는 봉래산(蓬萊山)을 의미했습니다. 《삼국지》〈왜인전〉에 나오는 “왜인은 대방 동남쪽 바닷속에 있는 여러 섬”에 산다는 문구를 단순히 오늘의 일본 열도로 풀이합니다마는 서양 사람들이 후에 그린 지도를 보면 그 섬들은 모두 산동반도와 한반도 북쪽 요동반도 사이의 바다에 있다고 했습니다. --- pp.202-203
위만의 영토 반/번/판한(潘汗)에 이르러 경계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두 글자는 그 지역에서 쓰던 말을 이리저리 뒤바꾸어 만든 표음문자가 분명합니다. 그곳에 패수라고 하던 강/여울이 있어야 합니다. 한(汗)은 한(韓)이 분명합니다. 요동에 사마천의 〈조선열전〉에 나오는 진번(?番)을 다른 글자로 적었습니다. 이곳이 한 무제가 만들었다는 한사군의 한 이름이었지만, 곧 사라지고 한 무제시대에 발해만 서안에 있었던 낙랑군에 흡수되었습니다. 진번(?番)은 산해관을 거쳐 우거왕의 수도에 이르던 길목에 있었어야 합니다. 삼한 중에서 가장 흡사한 이름이 변한입니다. 패수(浿水)는 변한(卞, 弁韓, 示韓) 땅에 있었습니다.
고조선의 수도, 즉 제도(帝都)가 산해관 북쪽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중원과는 이곳을 지나야만 되는 중요한 해육로(海陸路)를 통하여 무역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