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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양장 ]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20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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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498g | 132*193*30mm
ISBN13 9788972883340
ISBN10 897288334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 이 책을 추천한 담당자 : 이지영 (jylee721@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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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다.
배우들로 가득 찬 이 세상, 모두들 주역을 못 맡아서 안달하는데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는 사이에 그 밤의 주역이 되었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고, 아직도 모를 것이다.
이 글은 그녀가 알코올에 잠긴 밤의 여로를 위풍당당 끝까지 걸어간 기록이자 주역은커녕 길가의 돌멩이로 만족해야 했던 나의 쓰디쓴 기록이기도 하다. 독자 제현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나의 얼간이 짓을 둘 다 숙독 음미하여 안닌 두부의 맛과도 비슷한 인생의 묘미를 만끽하기를.
그리고 바라건대 그녀에게 성원을.


처음 말을 주고받은 날부터 그녀는 내 영혼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나는 가능한 한 그녀의 시야 안에 머물기 위해
3층 전차가 날아다니는 봄의 밤거리에서, 헌책의 신이 강림한 여름의 헌책시장에서,
공중부양을 하는 대학생과 괴팍왕이 휘젓는 가을의 대학축제에서,
감기로 자리보전한 겨울날 꿈속에서,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대사를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반복하는 내게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선배, 또 만났네요!”

헌책시장을 방황하던 그녀가 한 권의 책을 발견하고 의욕적으로 손을 뻗는다. 그곳으로 뻗어오는 또 하나의 손. 그녀가 얼굴을 들면 그곳에 내가 서 있다. 나는 신사적으로 그 책을 그녀에게 양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녀는 예의바르게 감사 인사를 할 것이다. 그 뒤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기지를 발휘하여 손쉽게 풀어나가면 된다. 그 끝에 있는 건 검은 머리의 아가씨와 함께 걸어가는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한 계획이었다. 한없이 달려 나가는 상상 속의 로맨틱 엔진을 멈출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머지 코피를 내뿜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 화상아!

남쪽을 바라본 나는 숨을 삼켰습니다.
어둡고 좁은 본토초의 남쪽에서 꺽다리 전차 같은 것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이쪽을 향해 오는 겁니다. 그것은 에이잔전차를 쌓아 올려놓은 것 같은 3층짜리 특이한 전차였는데, 지붕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진홍색으로 칠한 차체는 번쩍번쩍 빛을 냈고 차체의 모서리에는 여기저기 램프가 매달렸습니다. 긴 장대에 매달려 색색가지 빛을 발하는 깃발들, 작은 종이잉어, 목욕탕의 커다란 노렌 등이 차체 옆에서 만국기처럼 나부꼈습니다. 나는 한순간 도도 씨의 일이고 뭐고 다 잊고 어두운 밤을 밀어내듯이 다가오는 그 마법의 상자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인기척이 끊긴 어두워진 본토초지만 그 전차가 지나가는 부근만큼은 축제 때처럼 밝았습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어차피 꿈이야” 하고 훼방 놓는 후진 사람은 개한테나 먹혀버려라. 꿈이든 현실이든 그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내 재능의 보물 상자는 확실히 바닥을 드러낸 듯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는 공전절후의 재능이 남아 있었다. 망상과 현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버리는 재능!


나는 얼간이 바보 빙충이다. 갑자기 도망친 내가 그녀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녀석으로 보였을 것이다. 부끄러움을 알아라! 그런 뒤에 죽어라!

발아래 펼쳐지는 바보들의 제전을 개의치 않고 의연하게 홀로 하늘을 찌르듯이 서 있는 그 용맹스러운 모습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 선 나 자신의 모습 아닌가. 시계탑도 나도, 이 야단법석을 외면하고 영광스런 고독의 길을 택한 것이다.
“전우여! 우뚝 솟아 있는가?” 하고 나는 시계탑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나는 국가의 장래와 나 자신의 장래를 구별 없이 걱정하며, 매일을 오로지 사색에 잠겨 영혼을 단련하는 남자다. 먼 장래에 세상의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 영광스러운 무대에서 만장의 갈채를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고고한 철인哲人이 청춘 암시장에 불과한 대학축제 따위와 무슨 인연이 있겠는가.
그런 내가 이곳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는 오직 그녀가 온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애와는 무슨 진전이 있어?”
“바깥 해자는 착실히 메우고 있지.”
“해자만 계속 메울 거야? 언제까지 메울 작정이야? 사과나무를 심고 오두막이라도 지어서 거기 살 작정이야?”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깨버릴 정도의 신중성이 필요하다구.”
“아니야. 넌 해자를 메운 땅에서 무사태평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성으로 돌격했다가 쫓겨 오는 게 무서우니까.”
“잔인하게 본질을 찌르는군.”
“난 잘 모르겠어. 시간낭비 아냐? 적당히 친해져서 둘이 즐겁게 지내면 되잖아.”
“나한테는 내 방식이 있어. 남의 참견 같은 건 필요 없어.”


아직 바깥 해자도 다 메우지 못했는데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더 멀어질 작정인가. 운명의 장난아, 짓궂도다. 그녀는 뭔가 큰 역할을 맡았거늘 나는 그저 여기서 찬바람을 맞으며 길가의 돌멩이처럼 구르고만 있구나…….

불굴의 투지로 완전 무의미한 죽음의 심연에서 뜻밖에 되살아난 나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나의 개인사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의 아드레날린이 내 뇌를 채웠다. 그녀를 이 가슴에 안고 내 손으로 해피엔딩을 만들어야지. 태어나서 뭔가를 위해 이만큼 애써본 일이 없지 않은가.

한 마리 젖은 쥐가 차가운 빗속을 달린다. 그건 물론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맑은 하늘 아래로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 맑은 하늘이 마치 여름의 아지랑이처럼 저 멀리 도망치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저쪽 햇볕 속에 서 있는 것은 내 마음속의 사람, 검은 머리의 아가씨다. 그녀 주변은 따뜻하고 평온하고 신의 호의로 가득하다. 아마도 좋은 냄새도 날 것이다. 그것과 비교했을 때 내 몸은 어떠한가. 내 주위는 신의 호의는커녕 서툴게 분투하는 나 자신을 한탄하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휘몰아치는 사랑의 폭풍우가 몸을 때린다.


드디어 문을 여는 소리가 나고 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까딱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 기념할 만한 순간부터 나는 바깥 해자를 메우는 일을 마치고 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다. 독자 제현, 용서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 만날 날까지 잘 있기를.
안녕히, 바깥 해자를 메우던 나날이여―.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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