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는 분명 세속적이면서 아울러 고백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문적이어야 하죠.
왜냐하면, 언론의 전문성이야 말로 바로 세상의 방법을 가능케 하며 고백적일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핵심은 ‘전문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뉴스는 조작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점이 제게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나 부패에 대한 비판은 분명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기에 부패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 말입니다. 더불어 그렇게 말한 이는 그 후에 무엇인가를 해야만 합니다. 그럼요, 정의를 행해야죠. 옳고 그름을 가려내야죠.
하지만 전문 언론들은 그 무엇보다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너무나 일반적인 오늘날 언론의 세 가지 잘못에 빠지지 않고 말입니다. 그 잘못의 첫 번째는 반은 말하고 그 반은 말하지 않는 의도적인 ‘오보’이고, 두 번째는 ‘중상모략이나 모함’입니다.
네, 이런 것은 전문 언론이 아닌 거죠. 그리고 언론이 이와 같이 전문성이 없을 때, 다른 것으로 훼손되는 겁니다. 진실 혹은 거짓이 뒤섞여서 말입니다. 세 번째는 ‘명예 훼손’으로, 말 그대로 한 사람의 명성을 빼앗는 말을 하는 거죠. 이 경우 대부분 현재의 일을 들추는 경우는 없습니다. 거의가 과거의 것들을 까발리죠. 이렇게 언론의 전문성을 훼손하는 세 가지 악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전문성이 필요한 겁니다.
---「언론은 전문성이 필요합니다」중에서
우선, 제가 정치적이라고 그가 말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의했듯이 사람은 본래 ‘정치적인 동물’이니까요. 그러니까 그의 지적에 따르면 적어도 저는 확실히 사람, 한 인간인 거죠.
저는 이것에 대한 판단을 여러분에게 맡기려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만약 어떤 이가 그곳이 어디든 다리가 아니라 벽을 세울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내용과 맞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게 누구를 뽑고 뽑지 않을지 조언해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누군가 앞에서와 같이 말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만 말하겠습니다. 더불어 그가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 확인해 볼 필요도 있겠네요.
---「제가 정치적이라고요? 하느님, 감사합니다!」중에서
저는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이렇게 공헌해 주길 빕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충실하세요! 우리에게 맞추지 말고 말입니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우리 선배들을 배우지 말기를 바랍니다. 특히나 나이든 우리가 종종 범하는 저런 고질병을 여러분은 배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투덜거림의 투혼이죠. 네! 이를 우리에게서 배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발 우리로부터 ‘투덜이 신’을 섬기는 법을 배우지 않기를 빕니다. 항상 한탄과 한숨과 함께하는 것 말입니다.
대신 여러분은 긍정적이고 영적인 삶을 일구세요. 그리고 동시에 나아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특별히 좀 더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찾아 만나길 빕니다. 밖으로 나아가 시류를 거슬러 가는 것에 대해 겁먹지 마세요.
---「저에게 배우지 마세요」중에서
뒷담화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돌아다니며 ‘너 들었어? 그 애가 글쎄…….’ 하는 뒷담화 말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지옥과 같죠. 이것은 분명 나쁜 일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형제애와 우애의 관계가 중요한 거고요. 물론 친구들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친구는 하나나 둘’이라고 말하죠. 하지만 형제애는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제가 누이나 형제와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얼굴을 맞대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들을 욕보일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뒷담화와 험담은 끔찍한 일입니다. 하여 이러한 뒷담화의 뒤에는, 험담의 밑에는 시기와 질투와 못된 야망이 있는 셈입니다.
---「아직도 뒷담화 하시나요?」중에서
예수님이 이런 우리를 지나치지 않고 가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걸음을 멈추시고’라고 전하죠. 마음 한구석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분이 빛을 보기 원하는 이를 알아보셨다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그분께서, 어두운 눈멂 속에 머물지 않도록 자신을 이끌어 내는, 그러한 이해심 어린 빛을 원하는 이를 알아보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오심은 그동안 우리가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과 그리하여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분의 다가오심은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함을 느끼게 해 주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마음의 치유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후 진정 치유를 바라는 우리의 원의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거죠. 곧 기도를 드리게 하고 힘을 내어 울부짖으며 비로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르티매오가 했듯이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더불어 교회의 사명도 바로 이것이죠. 그럼요, 이는 교회에서 세례받은 모든 이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말과 그에 앞서 삶으로써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핵심 목표인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제외되는 어느 누구도 없이 말입니다. 오히려 보다 떨어지고 고통받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전하라 하셨죠.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감’을 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기뻐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성령의 힘과 그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분이 하느님의 복음이시며, 하느님의 자비이시고 하느님의 해방이시고 바로 그분이, 당신이 비천해지심으로써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자비를 증거하시기 바랍니다」중에서
이처럼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고 보잘것없이 보입니다. 당시 세상의 커다란 도시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이와 같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정말 하느님을 찾고 싶다면, ‘하찮음’ 속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누추함’ 안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감추어져 있는 곳을 찾아보십시오. 다시 말해 도움이 필요한 곳, 보다 도움이 필요한 곳, 곧 아픈 사람들과 주린 사람들 그리고 갇힌 사람들에게서 말이죠. 실상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삶에 대해 설교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지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나에게 오너라. 왜냐하면 너는 교회에 봉헌을 많이 했기 때문이니라. 너는 교회의 후원자이니, 하늘나라로 오너라.” 이게 아니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으로 값을 치루는 게 아니니까요. 아울러 주님께서는 “너는 매우 중요하며, 학식도 무척 대단하고 높은 명예를 지니고 있으니 하늘나라로 오너라.”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명성으로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없으니까요.
하늘나라의 문을 열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죠? 그렇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라고 말씀하셨죠. 예수님은 이처럼 ‘비천함’ 속에 계십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니까요」중에서
모든 종교 안에는 저러한 소규모의 근본주의자 무리가 늘 있다는 점입니다. 근본주의자들 말입니다. 물론 우리 가톨릭에도 존재하죠. 그리고 이러한 근본주의자가 살인도 불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때때로 사람은 혀, 곧 말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아니라 야고보 사도가 한 말이죠. 물론 칼로도 죽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볼 때, 폭력으로는 이슬람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올바로 확립할 수 없습니다. 그럼요, 이런 방법은 옳지도 않고 참된 것도 아니죠!
사실 저는 알-아자르 대학의 대大이맘과 긴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와 만남을 추구하죠. 예를 들어, 어느 아프리카 국가의 외교 사절께서 제게 말씀하시길, 그분의 나라 수도에 있는 희년 맞이 성문聖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하여 긴 행렬을 이룬다고 하더군요. 어떤 이들은 그 참에 고해성사를 드리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앞으로 앞으로 성모님의 제단으로 기도하기 위해 그렇게 나아가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이 바로 희년에 참가하려고 온 이슬람 신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형제들인 거죠.
또한 제가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을 때, 저는 그들을 찾아갔고 이맘께서도 저와 함께 무개차에 오르셨죠. 이처럼 우리는 같이 잘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소규모의 근본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문해 봅니다. 많은 젊은이가 고민이죠. 그러니까 우리 유럽인들이 얼마나 사상적으로 공허한지를 말입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은 약물이나 알코올에 빠지고 말죠. 그러다가 결국에는 저러한 근본주의자들의 그룹에 가입하러 가기도 하는 겁니다. 네, 우리는 이른바 IS가 폭력적인 이슬람 단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신분 카드인 것처럼 리비아 해안가에서 이집트인들 또는 그 밖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IS라고 불리는 하나의 소규모 근본주의자들 그룹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이 곧 테러리스트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옳지도, 정당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잘 살 수 있습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