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저는 두려웠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아듀”라고 말해야 할 날이 말입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것도 큰 목소리로, 이 자리에서, 그의 앞에서, 그와 이렇게 가까이서, 아듀라는 이 말을 발음하는 순간, 제 목소리가 떨리리라는 것을. “아-듀a-Dieu”[신Dieu-에게로a],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제가 달리 생각하도록 또는 달리 발음하도록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11
죽음, 그것은 먼저 무화無化; aneantissement나 비-존재, 또는 무이기 이전에 일종의 경험, 살아남은 자가 겪는 “응답-없음”의 경험입니다. 이미 『전체성과 무한』은 죽음을 “무로의 이행”으로 보거나 “다른 실존으로의 이행”으로 보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전통적 해석을 의문시합니다. 죽음을 무와 동일시하는 것은 카인과 같은 살인자가 바랄 법한 일이지요. 레비나스는 카인이 “죽음을 이렇게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무는 이제 “일종의 불가능성”으로서, 또는 더 정확히 말해 금지로서 제시됩니다. 타인의 얼굴은 내게 살해를 금지시킵니다. 타인의 얼굴은 내게 말하지요. “죽이지 말라.”--- p.20~21
저는 중단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가 레비나스에게서 감지했던 중단에 대한 불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전화 통화를 하다가 매 순간 단절과 침묵 또는 소멸을, 타자의 “응답-없음”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문장들을 말하는 사이에 또 때로는 문장 중간에서도 곧바로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상대방을 다시 부르곤 했지요.
우리가 살아 있다고 알아온 사상가, 우리가 읽고 거듭 읽어온 위대한 사상가가 침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p.28
이 질문-기도가 나를 레비나스에게로 돌려세웁니다. 그것은 아마, 내가 처음에 말했던 이 아-듀의 경험에 이미 참여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듀라는 인사는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듀는 어떤 목적성이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말하지요. “궁극적인 것이 아닌” 이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요. 아-듀는 존재 너머의 타자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p.36
칸트에 따르면, 보편적 환대가 평화로서 설립되어 자연적 적대를 끝장내야 한다는 겁니다. 레비나스에게서는 그 반대죠. 알레르기 그 자체가, 얼굴의 거부 또는 망각이, 그 이차적 부정성을 평화의 바탕 위에 기입하게 됩니다. 정치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 적어도 단순히 정치적 공간에 속하지 않는 환대의 바탕 위에 말이죠. 아마 여기에 칸트의 평화 개념과의 두번째 차이가 있을 겁니다. 칸트의 평화 개념은 겉보기에 법률적이고 정치적이죠. 국가들 사이의, 그리고 공화국 제도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정치는 이후에!」의 마지막에서 “평화는 순수하게 정치적인 사유를 넘어서는 개념이다”라는 시사를 내놓지요.--- p.99
사태는 환대에 반하는 범죄에 의해 악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범죄를 우리 시대의 객客들과 볼모들이 견뎌내고 있지요. 우리 가까이에서건 멀리서건 일어나는, 집단 수용소에서 유치留置 수용소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추방되는 일들을 말입니다(그래요, 환대에 반하는 범죄들이죠. 이건 “환대 죄delit d’hospitalite”와 구별해야 합니다. 환대 죄란, 이방인을 불법적 상황에서 유숙시키는 이는 누구든 처벌하고 감옥까지 보내던 것을 일컫습니다. 이 환대 죄가 오늘날 프랑스 법에 의해, 1938년에서 1945년의 법령과 행정명령의 정신을 통해, 같은 이름으로 다시 현실화하고 있어요).--- p.140
레비나스는 곧바로, 환대의 이 의무가 이스라엘과 여러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유대인적 사유”에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 일반에 대한 인류애로의 접근을 열어놓습니다. 유일한 책임의 소환과 인간적인 보편성 사이의 범례성, 그리고 선출의 만만찮은 논리. 오늘날은 인도주의적humanitaire 보편성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것이 숱한 어려움과 애매성을 가로질러, 예를 들면 비정부적 기구로서, 민족-국가와 그 정치를 넘어서 가려고 하는 한에서요.--- p.142
그러나 타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맞아들임을 유보시키고 무한정하게 조건짓는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레비나스는 언제나 [……] 지금의 평화la paix maintenant를 선호합니다. 또 그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cosmopolitisme보다 보편성을 선호하지요. 내가 알기로, 레비나스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거나 자신이 고려할 바로 여기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 정치주의가 순수한 환대를, 따라서 평화를, 무한정한 과정의 한 항으로 귀착시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진 이데올로기적 함축들 때문입니다. 그 함축들에 들어 있는 현대의 반유대주의가, 스토아주의나 바울의 기독교에서부터 계몽주의와 칸트에게까지 전달된 세계정치주의의 아름다운 전통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죠.--- p.167
우리는 다만, 피난의 권리와 우리 시대의 모든 긴급함과 관련해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진 차이를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서 분명히 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 시대, 도처에서,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성 베르나르 성당들에서, 수백만의 “상-파피에”(불법이민자들)와 “정해진 주거가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다른 국제적 권리를, 다른 국경의 정치를, 다른 인도적인 것의 정치를, 즉 민족-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인도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는 긴급함과 관련해서 말이지요.--- p.189
그러면서 레비나스는 아-듀를, “동일성의 자기 동일시”와도 “자기의식”과도 합치하지 않는 이 “무한 관념의 비상한 구조”라고 부르지요. 그것은 “에게”가?이것이 그것의 역할이죠?무한을 향해 자기를 돌려놓기se tourner 때문입니다. [……] 이 a(에게)는 단지 무한에게만 유일하게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에게 말함에 열려 있죠. 달리 말해, 그것은 자신의 방향으로 자기를 돌리고 자기를 보냅니다. 우선 거기에 응답하기 위해, 우선 그것으로부터 응답하기 위해서요. 그것은 자신의 “에게”를 무한에게, 이 “에게”를 부르고 자신을 그것에게 보내는 무한에게 보냅니다.--- p.192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낯선 이를 사랑하는 신”은 그래서 존재와 현상 너머의, 존재와 무 너머의 신이 아닐까요? 그 신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해도 아-듀를, 인사를, 성스러운 이별을, “낯선 자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욕망에 바치는 신이 아닐까요? 신의 “실존” 이전에 또 저편에서, 신의 있을 법한 있을 법하지 않음 바깥에서, 가장 절망적이지는 않다 해도 가장 세심한, 가장 “깨어난degrise”(레비나스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아-듀라고 말함은 환대를 의미할 겁니다.
--- p.195~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