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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유 | 동아 | 2016년 08월 1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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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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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년 08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364g | 128*188*19mm
ISBN13 9791155116722
ISBN10 1155116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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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물이야. 받아.”
설이 제게 건넨 서류가 무엇인지 안 봐도 뻔했다. 그는 서류 봉투를 받아 보란 듯이 그녀의 눈앞에서 찢어 버렸다.
“찢어도 별 소용없는 거 오빠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녀의 말이 그의 가슴에 더 큰 불씨를 만들었다. 정말 이혼을 원하고 있었다. 저는 화가 다스려지지 않는 데 비해 그녀는 너무나도 차분했고 이성적이었다. 침착하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혼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너무 대조적인 서로의 분위기는 그에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혼이 장난이야? 이혼할 거면 결혼은 뭐하러 해. 그만하자고 할 때 그만했어야지. 이제 와서 이혼? 한설. 내가 그렇게 쉽게 널 놔줄 것 같아?”
“난 오빠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내가 이혼하자고 하면 좋다고 당장 법원이라도 갈 줄 알았는데.”
“한설!”
“그만하자. 내가 지쳐서 더는 못 하겠어. 2년이면 많이 참았잖아. 안 그래?”
“참아? 네가? 아, 남편이 밖에서 딴 여자랑 뒹군 걸 모른 척한 게 네가 참은 거야? 그래?”
“그러길 바란 건 오빠였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그래서 아무것도 안 했어. 사준 네가 원하던 거였어. 그래서 그렇게 해 줬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니. 난 내가 내뱉은 말 지켰어. 결혼하는 대신 오빠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조용히 있으라며.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렇게 해 줬는데 왜. 그게 잘못된 거야? 더 이상 그렇게 하기 싫어서 이혼하자고 하는데 뭐가 문젠데. 뭐가 불만인데.”
너무나도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찾을 수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는 분노를 느껴야 했고 끝까지 이혼을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기 시작했다. 이건 전혀 사준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일이었다. 그녀의 곁을 벗어나는 일은 그 누구보다 제 자신이 원하던 일이었는데 왜 이토록 가슴이 묵직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저는 이렇게 불편하고 불안한데 너무나도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에게 화가 났다.
“오빠도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언제까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랑 숨 막히게 계속 살 거야.”
“그 입 다물어.”
“나 원래 성질 급하잖아. 잘 참지도 못하고. 그래서 포기하는 거야. 오빠 너한테 사랑 같은 거 바란 적 없어.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으니까. 네 껍데기도 이젠 싫어. 흥미가 없어졌어. 그러니까 그만하자.”
“그 입 다물라고 했어.”
“오빠 너랑 계속 이렇게 살면 나, 못 할 짓을 저질러 버릴 것 같아. 난 원래 포기가 빠르니까.”
결국 그녀는 그의 앞에서 마지막 보루를 꺼내 들어야만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준이 일을 크게 만들 것만 같아 더 이상 잡음을 원하지 않는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오빠 너랑 살면 난 배 속의 아이가 정말 싫어질 것 같아. 미워하게 될 거야. 분명해. 난 절대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그의 곁에 다가선 설은 멍하니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은 그녀는 끝내 참았던 말을 토해 냈다.
“불쌍하잖아. 사랑하지도 않는 우리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우리만큼이나 안됐잖아. 그래서 난 포기하지 않으려고. 그래서 오빠 널 포기하는 거야. 아이 대신에 사준 너를 포기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 그의 가슴이 저려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분노가 그를 삼키려 들지 않았다. 아이에게 가졌던 죄책감만이 그를 지배할 뿐이었다.
“나 좋다고 오빠 너랑 계속 살면 난 분명 나쁜 엄마일 거야. 이 아이는 절대 빛을 보지 못할 거야. 알잖아. 나 나쁜 년인 거.”
“설아.”
“그러니까 우리 헤어지자.”
순간 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멎어 버렸다. 분명 온몸으로 피를 내뿜고 있을 텐데 두근대는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설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둘 사이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한설인데, 그녀가 이제 그 끝을 원하는 것이다. 분명 좋아야 했다. 그토록 원했던 일인데, 분명 속이 후련해야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안녕 사준. 잘 지내.”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와의 마지막이 그렇게 끝이 났다. 잘 지내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곁에서 멀어져야 했다.
이튿날 그는 결국 JT 그룹 법무팀에서 보내온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나 바라던 그녀와의 이별이 어처구니없게도 제 삶을 완전히 망쳐 버린 한설을 통해 이뤄졌다는 사실에 그는 한동안 패닉에 빠져 지내야 했다.
한설은 역시 끝까지 지독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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