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소는 너무나 사악하여 그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 어떤 도시는 지독히 악랄해서 용납할 수 없다. 캘커타는 그런 곳이다. 캘커타에 가기 전이었다면 나는 저런 말을 듣고 그저 웃어넘겼을지 모른다. 캘커타를 겪기 전, 나는 악이 인간의 행동과 구별되는 힘이 아니라는 말을 결코 믿지 않았다. 캘커타를 경험하기 전, 나는 바보였다. --- p.7
“세상에.” 내 입에서 또 이 말이 튀어나왔다. 캘커타가 저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시커먼 구름을 뚫고 내려가자 벵골 만이 보이더니 약 65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밤 비행기로 여러 도시에 가 보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도시는 보통 전등 불빛이 기하학적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자정에 내려다본 캘커타는 수많은 랜턴과 화톳불, 낯설고 흐릿한 불꽃으로 빛났다. 생체 발광 곰팡이처럼 뭔지 모를 천 개의 은은한 불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명이 발달한 도시들은 쭉쭉 뻗은 길과 고속도로, 주차장이 바둑판처럼 직선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 예상과는 달리 캘커타에서 빛나는 수많은 불빛은 난잡하게 흩어져 있으면서도 굽이진 강가를 따라 뭉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런던과 베를린에 폭탄을 투하한 공군들도 이런 불타는 광경을 보았으리라. --- pp.31~32
공장만 하더라도 바스러진 벽돌과 녹슨 철근, 삐죽삐죽 무성히 자란 잡초, 깨진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공예품처럼 보였다. 암울한 미래의 모습 같았다. 산업화 시대가 공룡의 전철을 밟아 이 땅 여기저기에 너부러져 썩어 가는 사체를 남긴 것이다. 그럼에도, 무너져 내린 폐허 더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누추한 인간의 형상들이 시커먼 건물 출입구를 드나들었다. 저렇게 발 디딜 곳 없는 우리에서 살고, 저렇게 암울한 출입구를 드나들었다. 저렇게 발 디딜 곳 없는 우리에서 살고, 저렇게 암울한 공장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그리려 해도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분명 암리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창 밖으로 희망을 잃은 인간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 pp.152~153
늙은 시인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메마른 호흡이 씨근거리며 망가진 폐에서 올라왔다. 그는 다시 제정신이 든 것 같았다. 거칠고 산만했던 모습이 빠져나간 두 눈에는 지독히 지친 기색만 남았다. 그는 나병으로 뭉그러진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듯 협탁 위에 올린 책 더미를 쓸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거의 대화하는 톤에 가까웠다. “명심하세요, 루잭 씨. 이제 입에 담지 못할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동들이 넘실댈 것입니다.” --- p.266
‘모든 폭력은 힘을 행사하는 겁니다, 루잭 씨.’ 만일 내가 훨씬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았더라면, 저들에게 싹싹 빌면서 제발 보내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나는 저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음울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사지가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온갖 두려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그 아래 어디에선가 이런 자각이 들었다. 저들이 나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한, 아무도 암리타와 빅토리아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