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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의 여자

계단 위의 여자

[ 양장 ]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이동
리뷰 총점8.9 리뷰 24건 | 판매지수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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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8월 1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40쪽 | 402g | 118*185*30mm
ISBN13 9788952776815
ISBN10 895277681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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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계단을 내려온다. 그녀의 오른발은 계단의 가장 아래 칸에 닿았고 왼발은 아직 위쪽에 있지만, 다음 걸음을 막 떼기 직전이다. 여자는 벌거벗었다. 그녀의 몸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음부의 털과 머리카락은 금발이며, 불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광채로 반짝인다. 창백하고, 금발인 나체의 여인은, 회녹색 배경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지는 계단과 벽을 등진 채, 무게감이 없이 가볍게 부유하는 몸짓으로 관람자를 향하고 있다. 반면에 그녀의 긴 다리와 둥글고 풍만한 엉덩이, 탱탱한 젖가슴에서는 관능적인 중량이 느껴진다. --- p.10

“젊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느낌이에요. 틀어지고 어긋나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이. 더 이상 그런 감정이 없다면, 한 번 일어나버린 일과 한 번 경험한 일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늙은 거예요." --- p.37

두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오지 않자, 나는 늦을 수 있는 이유를 하나 생각해냈다. 세 시간이 지난 뒤에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냈고, 네 시간이 지난 뒤에 또 하나를 더 생각해냈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하나하나 만들어내면서, 그녀에게 혹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두려운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 두려움으로 결정적인 다른 두려움을 잊으려 한 것이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오고 싶지 않기 때문에. --- p.93

여전히 나는 그녀가 화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늘 그렇듯이, 몇 분 만에. 하지만 밤은 깜깜하지 않았다. 달빛이 반사된 나뭇잎들은 은색의 광채를 발했으며 바다 표면은 무수한 별들로 덮인 듯 반짝거렸다. 달빛이 이레네의 얼굴에 가득 쏟아지자 자글자글한 주름, 탄력 잃은 살갗, 피곤하게 늘어진 얼굴선이 무자비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났고, 내 가슴은 연민으로 에이듯 아팠다. 그녀를 향한,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연민. 우리는 늙었다. --- p.133

간혹 거울에 비친 내 나체를 보면 내 몸인 그것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 몸이 겪어온 일들, 그 몸이 안간힘쓰며 헤쳐온 일들, 그 몸이 아등바등 견뎌낸 일들! 내 감정은 자기연민은 아니다. 나는 자기연민을 경멸한다. 나를 향한 측은함이 아니라, 내 몸을 향한 측은함인 것이다. 아니면 시간의 허망함 그 자체를 향한 것이거나. 지금 내 감정은 이레네의 몸을 향한 측은함이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허약하고, 애처로운 몸으로, 내 목에 두 팔을 감을 때 보여주던 한없는 신뢰의 내맡김, 그 몸짓은 내 마음을 연민으로 떨리게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화가 나는 것은, 그녀가 나에게 더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159~160

“그림을 아트갤러리에 대여해준 것도 그를 이리로 유인하기 위해서였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는데, 그것은 대답을 회피하면서, 긍정과 동시에 부정을 나타내는 몸짓이었다. 어쩌면 내가 사용한 ‘유인’이라는 단어가 기분 나쁘다는 표시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슈빈트도 오는 거야?”
“그러기를 바라는 거지.”
“그러면 아트갤러리에 그림을 대여할 때 내가 올 거라는 생각도 했어?”
“너를 이곳으로 유인할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페터와 카를을 한 번 만나보려고 한 거야. 네 생각은 하지 않았어.”
나도 그 문제에 내가 아무 권한이 없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상처를 받았다. 험한 길을 운전하는 중에도 내 감정을 눈치챈 그녀는 한 손을 내 팔에 올렸다. --- p.172

이레네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넌 만사를 다 훌륭하게 하려고만 하는구나.” 그녀는 상냥하면서도 슬프게, 다시 한 번 더 반복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왜 울어야 하는지,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그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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