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사임당,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신사임당의 모든 것』은 남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사임당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뼈대로 하되 이율곡, 이사온, 신명화, 용인 이씨, 주나라 문왕, 성리학, 송시열, 조선의 당파싸움 등, 사임당의 생애 전후로 벌어진 조선의 역사를 조망하면서 사임당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최선을 다했다.
특히 서울과 강릉, 파주와 평창 현지를 낱낱이 답사하며 사임당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사임당과 이율곡이 남편이자 아버지 이원수를 만나러 왕래한 길을 뒤따르며 사임당이 친정어머니에 대해 지녔던 애절한 연민과 효성, 아버지 신명화를 극진히 기리던 마음, 남편과 아내의 지조를 이야기하던 배경을 담았다.
사임당이라는 호를 지은 이유와 주나라의 역사적 배경, 사임당 시절에 친영례와 가례의 혼용으로 벌어진 문화적 변혁, 이율곡이 직접 기록한 사임당의 행적,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에 이율곡이 금강산의 절에 잠시 들어가게 되었던 배경과 다시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이율곡과 송시열의 관계, 그리고 당시의 정치상황 등에 초점을 맞춰 사임당의 자녀 훈육과 혼인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었다. ---「글 들어가며」중에서
“…… 어쨌든 사임당이라는 호의 뜻은 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것인데, 신사임당이 그렇게 호를 정한 이유는 뭘까요?”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아버지, 즉 주 문왕(사후에 추존됨)을 낳은 태임을 본받겠다 한 거죠. 그래서 사임당은 유명한 서화가나 현모양처로만 알려지기를 원했다기보다는, 제 생각이지만, 조선의 왕을 낳은, 그게 아니면 왕의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사임당은 그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현모양처만이 아닌, 그 이상이라는 거죠.”
“조선의 왕을? 아니면 조선의 왕의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 사임당이라는 호 하나 지은 것을 가지고 너무 비약시킨 억측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사임당 이미지가 확 뒤바뀌게 되는데요? 현모양처 상과는 너무 차이가 나잖아요? 그렇다면 뭐랄까, 국가의 리더를 낳은 어머니? 아무튼 왕권을 바라보는 야심가처럼 보이게 되잖아요?”
고서점 주인은 나를 보며, 말도 안 되는 억측은 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기존의 사임당 이미지를 내심 유지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 p.36
“신사임당의 가문은 고려 개국공신들의 후손들이 모인 집안이에요. 그런데 당시의 나라는 조선이란 말이죠. 그런데 신인선이 사임당이란 당호를 짓고 중국의 태임을 본받겠다고 한다?”
“…….”
“보세요, 고려와 조선 사이에 중국의 은나라와 주나라의 역사가 매치되는 거 아니겠어요?”
김영수는 내 표정을 살폈다.
그러니까 김영수의 이야기인즉, 제후국 주나라가 상국인 은나라를 치고 명실공히 주나라 시대를 연 것처럼 사임당의 가문도 고려 개국공신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에서 다시 고려 시대를 열자는 목표가 있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앞서나간 추측이기도 했다. 조선에서 다시 고려 시대를 연다기보다는 조선에서 왕의 신임을 얻어 세력을 넓힌다는 추정이 더 현실성 있을 것이다. --- p.55
“사임당은 아마도 영재교육의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네에?”
“아니, 왜 요즘도 문제잖아요? 부모들이 어린애들을 영재로 키우니 뭐니 하며 여러 학원 보내면서 놀고 싶은 애들 못 괴롭혀서 난리인 가정들이 많잖아요? 초등학생이 학교숙제랑 학원숙제 하느라 새벽 두 시에 잔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고, 영어학원이랑 음악학원도 다니는데 피아노 선생이 아이에게 피아노를 왜 치냐고 묻자 ‘그냥 엄마가 시켜서 해요’라고 대답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또 뭐라더라? 아이가 뮤지컬 학원엘 다니는데 그거 왜 하냐고 물었더니 ‘내가 이걸 하면 엄마가 좋아해요’라고 대답했다고도 하고. 이 작가님,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몰라요? 나도 다 아는데. 고서점을 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면 안 되잖아요?”
고서점 주인은 연신 싱글벙글 표정이었다. 사임당에 대해 자기 나름의 판단을 했고 그걸 알려주겠다는 신호였다.
고서점 주인의 이야기인즉, 영재교육이 문제였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임당이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글을 배우고 했던 게 모두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닦달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요즘 문제가 되는 사교육 같은 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영재교육이 조선 시대에도 분명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 p.60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용인 이씨가 자수 놓는 걸 보고 흉내를 냈는데요. 이사온은 외손녀의 그런 재능을 보고 1510년 무렵이던 일곱 살 때부터는 그림을 가르치면서 교재로 안견의 산수화를 사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안견은 세종대왕 시절부터 조선을 대표하는 유명한 화가였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사임당은 산수화를 먼저 그리면서 그림 실력을 키운 게 맞는 거죠.”
“아, 그렇지! 맞네. 산수화를 그리면서 그림 공부를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사임당의 그림들은 풀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草蟲圖)가 대부분이에요. 그리고 글씨도 일부 있고요. 분명히 산수화를 많이 그렸을 텐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산수화 작품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고요.”
장민석 대표가 입맛을 다셨다.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 pp.95-97
“그럼 태임의 태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하기로 하지. ……
우선 ‘시경’에는 이렇게 나와.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한결같으며 장중하여 오직 덕을 행했다. 문왕을 임신해서는
눈은 사악한 빛을 보지 않았고
귀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은 오만스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서 있을 때는 발을 헛딛지 않고
다닐 때는 걸음을 천천히 하며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고
고기도 바르게 베인 것이 아니면 먹지 않고
밤이면 소경으로 하여금 글을 읽고 시를 외우게 하여
마음을 화락(和樂)하게 하였다.’
또, 중국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烈女傳)’이나 ‘소학’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지. 태임이 태교를 엄격히 했다는 내용이야. 이런 정도의 책들은 아마 사임당이 10대 시절에 다 마스터했을 거야.” --- pp.139-140
파주 두문리에 사임당 묘소가 있었다는 기록은 송시열이 쓴 ‘신사임당 묘갈’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 지명은 바뀌지 않았거든. 신사임당 묘갈의 첫 구절이 ‘파주의 두문리’라는 위치를 명확하게 표기하고 있어. 하지만 문제는 옛 지명과 현재 지명이 다르다는 거야. 그래서 옛 지명이 요즘 어느 곳을 말하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게 중요하지. --- p.151
‘훗날 송시열도 이곳에 와서 봤던 거야. 자신의 스승 이율곡이 태어나고 자란 곳, 오죽헌을 말이지. 그런데 이율곡에 대해 학문적 성과를 기록하고 이론을 정립하다 보니 뭔가 더 많은 자료가 필요했을 거야.
이율곡이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송시열이 이율곡의 아버지 이원수에 대해 조사해보니 별것 없었거든. 그래서 외할아버지 신명화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전형적인 어머니상인 용인 이씨를 자연스레 알게 되었을 거야. 물론 이들의 딸이자 이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당연한 순서일 테고. 결국 송시열은 이율곡을 대학자로 키워낸 데는 어머니 사임당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간파했을 거야.’
오죽헌을 돌아보고 얻은 소득은 사임당의 모성애뿐만이 아니었다. 사임당이 태어나고 자란 곳, 그곳에서 다시 이율곡을 낳고 키우면서 사임당이 느끼고 생각했던 자녀교육의 목표, 그리고 사임당 스스로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다. --- p.236
“나는 황진이처럼 뛰어난 여성들에 대해서는 최소한 지위상승만은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은 더 이상 고려 시대도 아니고 조선 시대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황진이 같은 여성들은 지금 이 시대에라도 그들의 신분을 계속 기생으로 푸대접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예능인 정도로는 바꿔놔야 한다고 생각해.”
김 박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금 그 말, 황진이처럼 당대에 뛰어난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옛날 그대로 기생이니 첩의 딸이니 하는 인식에만 머물러 있다면 후대에도 별로 나아질 게 없을 거라는 점이다.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능을 키우고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일가를 이룬 여성 인물들에 대해서는 지금 시점에서라도 그들의 지위를 격상시켜주자는 주장이다. --- p.281
어머니는 항상 강릉 친정을 그리워하였는데, 밤이 되어 인기척이 없어진 후에야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때까지도 잠을 못 잔 날들이 있었다. 하루는 심씨 성을 가진 친척어른이 데리고 온 첩(시희侍姬)이 거문고를 연주하였는데 사임당이 눈물을 흘리며 “거문고 소리가 그리움이 있는 사람을 울게 합니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도 같이 슬퍼하였지만 사임당의 속뜻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 pp.303-304
“그래서 우리가 알던 사임당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할 시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모양처 사임당? 맞아요. 하지만 그뿐이었을까요? 조금 더 크게 봐야 해요. 사임당은 나라의 큰 인물을 키워내고자 평생을 바친 진정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고요, 삶의 모든 면에서 자식들에게 자신부터 모범을 보이며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배운다는 도리를 몸소 실천한 이 시대의 어머니인 것이죠.
사임당은 또 고려 개국공신 가문 출신이었잖아요? 아들들의 한자 이름 옆에다 ‘임금 왕(王)’의 의미를 모두 넣은 것만 봐도 그 원대한 포부가 그려져요. 조선 땅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과 같이 당당한 인물로 성장하여 자기 뜻을 펼치길 기원했던 것으로 볼 수 있죠. 그래서 사임당을 가리켜 시대의 여걸이라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네. 일리가 있게 들리네요.”
“멋지잖아요? 우리 역사에서도 사임당 같은 시대의 여걸이 존재한다는 것이요. 1만 원 권 지폐에는 세종대왕이 있지요? 그럼 5만 원 권 지폐에 사임당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죠. 사임당은 이 시대의 어머니이자 여걸이니까요.” --- pp.322-323
사임당에 대한 이 같은 궁금증들을 염두에 둔 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동안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사임당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어쩌면 사임당은 우리가 생각하던 현모양처 이상의, 시대를 내다보고 미래를 준비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기억해야 할 여걸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사임당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러한 경외감 내지는 깊은 숭고함에 대한 존경심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책의 부제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신사임당의 모든 것’이라고 달게 된 이유다.
---「글 나오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