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 유아독존’과 ‘독생자’는 다 좋은 세상과 직결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다 좋잖아요. 그런데 그 독생자가 서로를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거든요. 나빠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으니까 배우지 않으면 그냥 알지 못합니다. ‘배운다’는 하나밖에 없는 다른 것이 좋은 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여러분, 제게 와서 배우세요’ 합니다. 더불어 ‘제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라고 합니다. --- p.23
사람이라는 게 참 묘해요. 다 좋은 세상이 아닌가 봐 그러면서 죽을 생각을 하는데 그때 죽는 게 나쁜 줄 알면 죽을까요? 안 죽죠. 사는 게 힘들고 더 살고 싶지 않아서 갈 곳을 찾는데 죽는 게 나쁘다고 하면 갈 리가 만무해요. 사는 것은 나빠도 죽는 것은 좋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나쁘기는 마찬가지라며 일부러 죽을 리도 없고요. 여러분, 세상이 안 좋다 싶으면 행복하지도 않고 살고 싶지도 않은 게 사람입니다. --- p.27
퇴계 이황의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라는 글에 당시성공(當時成功)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當)은 있는 그 자리라는 말입니다. 당시(當時)와 성공(成功)은 꼭 같습니다. 한마디로 다 좋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여기 앉아 있죠? 이 당시가 성공이에요. 퇴계 이황이 성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그렇게 했습니다. --- p.47
칸트는 자신의 비판철학 체계를 마무리하는 말년의 저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1794)에서 인류는 악과 투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쁜 것을 없애야 한다고요. 지금 이슬람국가(IS)도, 선진강국들도 저마다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나쁜 것이 있다며 사람들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좋다고 하니까 뭐가 좋은지는 싸워서 가려 보자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미국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의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기 나름의 ‘지상천국’을 이루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데, 그건 누가 봐도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 p.58
우리가 그렇게 왈가왈부하면서도 칸트를 읽는 이유가 있죠. 이성을 다루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감정은 이성이 아니라는 한마디인데, 칸트가 바로 그 말을 하는 철학자거든요. 이것이 반대로 우리에게 감정이 이성임을 확인시켜 주는 좋은 계기가 돼요. 칸트는 스피노자를 읽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칸트를 읽으며 감정도 이성이라고 확인합니다. 이 말로는 충분하지 않아 이성 또한 감정이라고 같이 확인합니다. --- p.102
우리가 역지사지라고 하는데, 자리를 바꿔 생각하는 건 어려워요. 그 사람의 자리가 어디인지조차 알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그 자리에서 생각하는 게 되겠어요. 자리를 바꾸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게 돼요.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 돼요. 퇴계가 말한 기발이승(氣發理乘), 스피노자가 말한 ‘정신의 수동 상태’가 돼요. 이렇게 되면 세상을 많이 알수록 원망이 늘어요. 감정의 자기인식이어야만 세상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다 좋은 세상임을 확인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