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초겨울, 바르바라 일행은 순회공연 때문에 그르노블 근처를 자동차로 이동 중이었다. 말없이 메르세데스를 운전하고 있던 피에르에게 바르바라가 갑자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생 마르슬랭을 지나는 거지? 내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생 마르슬랭이지? 피에르, 분명하지? 그리로 가요!”
피에르와 마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두 사람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녀는 여행 중 자신이 아는 도시를 지날 때에는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못 본 척하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은 어떤 생각이 든 것일까? 생 마르슬랭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녀는 화장을 했다. 검은 눈, 진홍빛 입술. 그녀는 팔찌를 찰랑거리며 머릿결을 손질했다. 그녀의 뺨은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저기 차를 세워요.”
짤막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진하게 배어나는 목소리임은 분명했다.
광장을 끼고 돌아서 가자 교회가 나왔고,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따라 가자 또 다른 길이 나왔고, 그곳에 그녀가 찾는 집이 있었다. 자그마한 정원이 딸린 집이었는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라 장미꽃은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을 쥐고서 그녀는 말이 없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두 눈은 젖어 있었다. 그들은 차로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자동차가 서서히 속력을 높여가자 그녀는 잠이 들었다. 손에는 둘둘 말린 손수건이 흡사 마른 눈덩이처럼 쥐여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이 우연한 방문은 [나의 어린 시절]이란 노래가 되어 1968년 여름에 발표된다.
내 잘못이야, 돌아온 건
이 도시에, 멀리, 잊혔던 곳
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내 잘못이야, 돌아오려 한 건
이 언덕 저녁이 미끄러져 오던 곳
푸른 잿빛, 침묵의 그림자
그때처럼 난 다시 보았지,
긴 세월이 지난 다음,
그 언덕을, 서 있는 그 나무를
그 옛날처럼,
난 걸었어, 잉걸 같은 관자놀이,
내 발걸음에 눌려 질식했다고 여겼지
우릴 사로잡던 옛날의 그 목소리들이
그들은 조종을 울리러 돌아오네
난 그 나무 아래 누웠지
그 옛날과 같은 향기
하염없이 흘렸네 눈물을,
눈물을
나뭇등걸에 내 등을 붙였어
그 나무는 내게 다시 힘을 주었어
내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오랫동안, 난 눈을 감았어
어쩌면 잠깐 기도를 했는지
나의 순진무구함을 다시 찾았네
저녁이 깊어지기 전에
난 보고 싶었어
그 정원을 어린 우리가 내던 소리는
맑은 샘처럼 솟아나고 있었지
장, 클로드 그리고 레진, 다시 장
모두가 어제처럼 다시 돌아갔어
진한 향기의 붉은색 샐비어도,
골목에는 갈색 달리아도,
우물도, 전부, 난 전부 다시 보았어
그러지 말 걸
전쟁이 우릴 그곳에 던져놓았지
분명히, 다른 애들은 덜 행복했어,
그들의 어린 시절 예쁜 그때에
전쟁이 우릴 그곳에 던져놓았지
우린 무법자처럼 살았어
난 그게 좋았어, 생각해 보면
오, 나의 봄, 오 나의 태양,
오, 내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
오, 나의 열다섯 살, 오 나의 놀라움,
고통스럽게 왜 돌아왔을까
오, 9월의 신선한 호두
오, 밟힌 오디의 향기
미친 짓이야, 전부, 난 전부 다시 보았어
그러지 말 걸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돼
추억 속에 숨겨진 시절로
어린 시절의 축복받은 때로
모든 추억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훨씬 괴롭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찢기 때문에
당신은,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오늘
당신은 땅 속에서 따뜻하게 자고 있네요
나는, 나는 여기에 왔습니다
여기 다시 찾으려고 당신의 웃음을,
당신의 분노를 그리고 당신의 젊음을
그러나 나는 절망 속에 혼자 있습니다
후회가 됩니다
도대체 내가 왜 다시 돌아왔을까요
그것도 혼자, 이 길 저 길을 돌아서,
춥고, 두렵고, 저녁이 깊어갑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나의 과거가 나를 십자가에 매단 이곳에
영원히 잠들어 있네요 나의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은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한 편의 교향곡이 될 수도 있다. 자크 브렐은 ‘인생이란 어린 시절의 못 이룬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한 편의 노래 속에 바르바라는 자신의 삶을 축약해서 그리고 있다.
정말로 우연히 그녀는 생 마르슬랭을 지나가다가 독일군 점령 시대, 그 위험했던 시절에 그녀의 가족이 숨어 살던 집을 찾게 된다. 그녀의 노래는 사라지고 없는 옛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그리고 있다. 장미꽃, 달리아꽃,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한 정원, 함께 뛰어놀던 오빠 장, 동생 클로드와 레진을. 그들은 “무법자처럼” 살았고 그것을 즐겼다고 했다. 어린아이는 천성적으로 신비와 모험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대인 어린이들은 언제나 도망가고 숨어야했기에 삶을 즐거운 모험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전쟁은 그들을 위험한 도피의 길로 내몰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비슷한 운명의 다른 유대인들보다는 행복했다. 그들은 “9월의 신선한 호두도 땅에 떨어진 잘 익은 오디”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르바라는 그리운 어머니를 노래한다. 어머니의 젊음을, 어머니의 분노를,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찾으며 홀로 절망에 빠진다.
노래는 “내 잘못이야”로 시작하여 곳곳에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그러지 말 걸”과 같은 후회의 표현을 담고 있다. 옛 이야기는 그녀를 괴롭힌다. 따라서 다시 옛날을 환기하는 것은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왜냐하면, “모든 추억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훨씬 괴롭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찢기 때문”이다. 추억은 괴로운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스탤지어를 넘어서서 폭력적이다. “나의 과거가 나를 십자가에 매단”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녀의 노랫말은 은유적이면서 대단히 정확하여 그녀의 삶의 편린을 응축하여 담아내고 있다. 그녀가 그 속에 심어 놓은 인생의 파편은 생의 궤적을 연대기적으로 잘 배열하고 있다. “오 나의 봄, 오 나의 태양, 오 내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 오 나의 열다섯 살, 오 나의 놀라움”은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그 고통과의 화해를 위한 기록의 표제어들이다. 이 표제어 아래 저 깊은 곳에 바르바라가 감추어 놓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을 찾으려면 우리는 펜을 좀 더 옛날로 향해야 할 것 같다.
바르바라는 1930년 9월, 파리 17구, 브로샹 길 6번에 있는 수수한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오후 4시에, 자크 세르프, 에스테르 세르프 부부는 둘째 아이이자 첫째 딸을 얻었다. 부부는 이 딸에게 모니크라는 이름을 주었다. 모니크의 오빠 장은 1928년생으로 아직 만 두 살이 채 되지 않았다. 1905년생인 그녀의 어머니 에스테르는, 모이즈 브로드스키와 하바 브로드스키의 딸로서, 중부 유럽 출신의 유대계 혈통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모이즈는 그녀가 세 살 때 사망해서 그녀에게 외할아버지의 기억은 없었다. 반대로 외할머니 하바는 생생한 기억 속의 존재였다. 그녀는 외할머니를 “그라니(Granny)”라고 불렀는데 사랑과 희생의 화신이었다. 밤이 되면 하바는 자신이 살았던 중부 유럽의 전설과 신화로 어린 손녀의 상상을 자극하였고 맛있는 케이크로 어린 손녀를 행복하게 했다. 바르바라는 자서전에서 그리운 할머니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녀는 몸집이 자그마했고, 높은 광대뼈에, 크고 검은 눈 그리고 아주 예쁜 손을 가지고 계셨다. 그녀는 몰다비아 지방의 티라스폴에서 태어나셨는데, 나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태어나셨다. 그녀한테는 꿀 냄새가 났고 코린트 지방의 금빛 포도를 얹은 케이크나, 사과와 껍질 깐 호두를 얹은 스트루델을 만들어 주시곤 하였다.” 1904년생인 모니크의 아버지 자크 세르프는, 막심 세르프와 루이즈 세르프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안도 오래 전부터 알자스 지방에서 거주해온 유대계 출신이었다.
1930년대에 에스테르는 파리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몸집이 작고 귀여운 느낌을 주어 주위에서 에디트 피아프를 닮았다고 했다. 자크는 상업 대리점 업에 종사했다고 하는데, 직장 자체가 불분명하면서 지방 출장이 잦았다. (혹은 모피 의류 외판상을 했다고도 하는데 분명하지 않다.) 부부가 맞벌이를 했지만 살림은 언제나 적자를 걱정해야 했다. 모니크가 아직 아기였을 때 그녀의 부모는 브로샹 길을 떠나 가까운 곳인 놀레 길로 이사했다.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바티뇰 광장이 친숙해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자크는 파리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1937년이었다. 자동차로 그들은 파리에서 8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마르세이유로 향했고, 한 해가 지난 다음, 다시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중부 지방 로안느로 떠났다. 이곳에서 1938년 8월 24일, 셋째 아이 레진이 태어난다. 왜 갑작스럽게 마르세이유에서 로안느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니크의 뇌리에는 새벽에 득달같이 찾아와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집달리의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안느에서는 가난 그 자체였다. 어른들의 해진 옷을 뜯어고쳐 내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이게 못마땅했지만 할 수 없었다. 로안느에서는 집달리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새벽에만 나타났다! 내 눈 앞에서 가구란 가구는 죄다 없어지는 걸 보았다. 부모님의 침대만 빼놓고.”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런 말만 들었다.
---「제1장 도피의 계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