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熱河)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사냥을 즐겼던 휴양지다. 온천이 많아 강물이 얼지 않는다고 해서 열하라고 부른다.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내몽고 지역에 있다. 열하는 처음 여행 일정에는 없었다. 그러나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황제가 열하에 머물러 있는 바람에 그곳까지 가게 된 것이다. 한양에서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까지 가는 데는 한 달 보름 정도가 걸린다. 그 거리는 무려 4천 리, 1천 6백 킬로미터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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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냇가에서 다투는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말소리가 마치 새가 지저귀는 듯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급히 가서 보니, 득룡이 되놈들과 예물의 많고 적음을 다투고 있었다.
대개 예단을 나누어 줄 때면 반드시 전례를 따라 그대로 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봉황성의 교활한 청인 관리들은 반드시 무슨 꼬투리를 잡아 한 가지라도 더 빼앗으려고 기를 썼다. 이런 일을 잘 처리하고 못하고는 순전히 *상판사의 마두에게 달린 것이다. 만일 그가 일에 서툰 풋내기라든지, 중국말을 제대로 못한다든지 하면, 그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년에 이렇게 했다 하면 내년에는 벌써 그것이 전례가 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전례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사신들은 이와 같은 내막을 모르고 오직 책문 안으로 들어가기에만 급하여 자꾸만 역관을 재촉하고 또 역관은 마두를 재촉하여, 그 폐단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 pp.35~36
우리나라는 명나라를 2백 년 동안 섬기며 충성하기를 한결같이 했다. 비록 속국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한 나라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당하고(명나라의 멸망을 가리킨다.), 온 백성이 머리를 깎아서 모두 오랑캐가 되고 말았다. 대륙의 한쪽 구석에 있던 우리나라는 다행히 이런 수치를 면할 수 있었지만, 중국을 위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청나라에는 성곽과 궁궐과 백성 등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으며, 훌륭한 가문과 학문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이후의 성스럽고 지혜로운 임금과 한나라·당나라·송나라·명나라의 좋은 법률과 아름다운 제도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저들은 오랑캐일망정 중국 문물의 훌륭함을 잘 알고 있어서, 곧장 이를 빼앗아 차지했다. 그래서 이제는 중국의 문물이 마치 그들 만주족이 본래부터 지녔던 것처럼 되기에 이른 것이다.
천하를 위하는 것은,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취하여 본받아야 한다.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고 한 것은,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혔던 것을 분하게 여겨 본받을 만한 좋은 점마저 물리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그들이 중국에 영향을 미친 부분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어리석고 융통성 없는 풍속부터 개혁시켜야 한다. 밭을 가는 법이나 누에를 치는 법, 그릇을 굽는 법이나 풀무를 부는 법에서부터 공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풍성하게 하는 것까지 모두 배워야 한다.
그들이 열을 하면 우리는 백을 해야 한다. 먼저 우리 백성들을 잘 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몽둥이를 만들게 하여,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충분히 매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중국은 오랑캐의 땅이 되어 볼만한 것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pp.87~88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서도 생이별보다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아아, 슬프다. 앞서 소현세자께서 심양에 계실 때, 신하들이 머물고 떠날 때, 또 사신들이 오갈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어떻게 머물렀다 떠나고, 또 어떻게 참고 보내며, 어떻게 그 슬픔을 참았겠는가. 아, 슬프도다. 내 비록 이나 벼룩처럼 미천한 백성이건만, 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그 일을 생각해 보아도 정신이 싸늘하고 뼈가 저리어 부러질 것 같도다. 하물며 그 당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절하고 하직할 때의 그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더구나 그 당시는 눈물을 참고 울음을 삼키며 얼굴엔 슬픈 표정조차 드러내지 못할 때가 아니던가! 떨어져서 머무는 여러 신하들이 아득히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저 요동의 넓은 들판은 끝이 없고, 심양의 우거진 나무들은 멀기만 한데, 사람은 팥알처럼 작아지고 말은 지푸라기처럼 가늘어져서 시력이 다하는 곳에 땅의 끝, 물의 마지막이 하늘에 닿도록 아련하니, 해가 저물어 관문을 닫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으랴.’
이와 같이 이별에 대한 생각을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20여 리를 갔다. 성문 밖뫀 꽤 쓸쓸한 편이어서 별로 눈에 드는 경치가 없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둡기 시작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 수십 리나 돌아서 갔다.
--- pp.148~149
아침나절에 황제로부터 사신들을 만나보겠다는 명이 떨어졌다.
통관의 안내를 받아 정문 앞에 이르니, 동쪽으로 난 좁은 문에 황제를 지키는 여러 신하들이 여기저기 서 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했다. 이윽고 군기 대신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물었다.
“너희 나라에도 절이나 관제묘가 있는가?”
잠시 후, 황제가 친히 정문을 나와 문 안의 벽돌을 깔아 놓은 곳에 앉았다. 따로 의자나 탁자를 가져오지 않고, 단지 평상 위에 누런 보료를 깔았을 뿐이었다. 황제의 양편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누런 옷을 입고 있었다. 그 가운데 칼을 지닌 사람은 서너 쌍뿐이고, 양산을 받치고 있는 사람들 또한 두 쌍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회자의 태자가 앞으로 나와서 몇 마디 하고 물러났다. 그 다음으로 사신과 세 *통사에게 나오라는 명이 내리자, 모두들 나가서 장궤했다. 장궤는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무릎이 땅에 닿기만 할 뿐 엉덩이를 발바닥에 붙이고 앉는 것은 아니다.
--- pp.169~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