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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신약 편 3부
eBook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신약 편 3부

: 주전 30~70년

[ EPUB ]
리뷰 총점9.3 리뷰 4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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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년 09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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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용량 EPUB(DRM) | 47.07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3.5만자, 약 4.1만 단어, A4 약 85쪽?
ISBN13 978895312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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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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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행 19:23).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그 도’라는 이름으로 탄생할 당시 이 종파는 확실히 유대교라는 바운더리를 벗어난 새로운 종교로 인식된 것이 아니었다.
1세기 당시 유대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등의 다양한 종파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했는데, 새롭게 시작하는 ‘그 도’도 나사렛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나사렛파’로 불리는 유대교 내의 새로운 분파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유대교 종파에서 본다면 빠르게 성장하는 나사렛파가 ‘나사렛 이단’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사람 역시 ‘그 도’를 유대교 내의 독특한 이단 정도로 보았지 ‘기독교’로 불리는 새로운 종교의 출발로 여기지는 않았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행 24:5).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 도’ 또는 ‘나사렛파’로 불린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신약 편 3부에서는 꽤 자주 언급할 것이다. 기독교 교회라 부르기에는 분명 어폐가 있음에도 나는 이 공동체를 현대인의 시각에 맞추어 그저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르려 한다.---p.21

1세기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다룰 때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1세기 당시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것이다. 사도행전 2장 9-11절에는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출신지 목록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9-11).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면서(주전 586년) 최초로 발생한 유대인 디아스포라 현상은 알렉산더의 정복 전쟁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되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70개의 신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온갖 특혜를 베풀었다. 알렉산더의 정책은 그 뒤를 이은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코스 왕조에서도 계속되었는데, 이로 인해 주후 1세기경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가히 절정에 달하게 된다. 주후 1세기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회는 이후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언급하는 게 좋을 듯싶다.
주후 1세기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회는 로마 제국에서도 그리스어권인 제국의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멀리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에도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정복(주전 63년) 이후 노예로 끌려와 살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기를 지나면서 평탄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바벨론에 형성된 유대인 사회는 파르티아(성경에서는 바대, 행 2:9) 제국의 통치하에서 점점 번성해 갔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예루살렘과 강력한 종교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성지순례에서 잘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땅의 작은 도시인 예루살렘은 뜻밖에도 범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사도행전 2장 9-11절에 언급된 주후 30년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의 명단은 그 출신지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파르티아(바대) ,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까지 미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러한 원방(遠方)을 말한 후 유대를 말하고, 다시 북쪽으로 향해 갑바도기아와 폰투스(본도)를 명단에 올리고 있다. 그는 흑해 연안에서 서쪽으로 아시아 지역과 내륙의 브루기아와 밤빌리아를 말한 후 바다를 건너 이집트와 그 이웃 구레네로 향한다. 이후 로마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를 구분해서 언급하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누가의 디아스포라 명단은 크레타 섬(그레데)과 나바테안(아라비아)을 끝으로 매듭지어진다.---p.26-28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출신
바울의 프로필은 그의 고향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좋을 것이다. 바울은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체포되어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 앞에 끌려갔는데, 심문하는 천부장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행 21:39).

소아시아 남동부에 위치한 길리기아 지역은 주전 2세기 중엽부터 셀류코스 왕국의 지배권이 붕괴되면서 지중해 해적들의 본거지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다. 하지만 주전 67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대대적인 해적 소탕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이 지역은 타르수스(성경에서는 다소)를 수도로 한 길리기아 속주로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바울이 태어날 무렵 다소는 철학, 수사학을 비롯해 모든 학문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떨친 일종의 대학 도시였다.
하지만 이 도시는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처럼 다른 지역 출신의 유학생들까지 끌어들이는 매력은 없었다. 다소의 학도들은 주로 그 지역 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은 고향에서 어느 정도 학문을 익힌 후에는 더 깊은 학문 수련을 위해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 등지로 유학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떠나고 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바울이 출생하기 전 다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은 스토아 학파 출신인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였다. 그는 한때 옥타비아누스(성경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 눅 2:1)의 개인교사를 지낸 인물인데, 주전 15년에 고향 다소로 돌아온 후부터는 철학자에서 행정가로 변신해 부패한 시정을 개혁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그의 개혁 드라이브에서 바울의 생애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아테노도루스의 개혁 조치 중 하나로 통과된 시민법인데, 이 법률은 다소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500드라크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는 자격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바울이 천부장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라고 당당히 밝힌 것을 볼 때 그의 이름이 다소 시의 시민 명부에 등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가계에서 태어났고 또한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재산 조건에도 부합했음을 의미한다.
다소는 고대부터 비옥한 평원을 낀 최고의 입지 조건으로 인해 번영을 구가해 왔다. 다소의 평원에서 자란 아마(flax)로 짠 다소산(産) 세마포는 아주 유명해 고대 저술가들의 글에도 종종 등장했다. 특히 추위와 습기를 막는 데 사용되는 염소털로 짠 ‘길리기움’ (cilicium)은 다소의 대표적인 지역 특산품이었다. 다소가 속한 지역인 ‘길리기아’ (Cilicia)란 이름도 그 지역 특산품인 길리기움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누가는 바울이 ‘천막 만드는 자’ (행 18:3)였다고 소개하는데, 아마도 바울은 그 지역 특산품인 ‘길리기움’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한 부모 밑에서 이 일을 배우며 유복하게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로마 제국 동부에 있는 다른 도시들처럼 로마 시민권의 특권을 소유하고 있던 다소의 시민들은 자연히 귀족적인 엘리트 계급을 형성해 나갔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소읍이 아닌’ 다소의 시민이라고 목에 힘을 주고 말한 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p.65-67

아그립바 1세의 죽음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주도된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핍박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그라졌다. 아그립바 1세의 죽음과 관련해서 사도행전은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그의 죽음과 관련된 정황을 이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당시의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아그립바 1세의 죽음과 관련된 스토리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아그립바 1세의 영토에서 가까운 도라(Dora)라는 페니키아 항구 도시에서 이전에 가이우스 황제 때 야브네에서 일어난 소동과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주후 42년) . 어느 젊은이들이 그 도시에 있는 유대인 회당 안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형상을 세운 것이다. 아그립바 1세는 즉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항의했고, 페트로니우스는 범법자들을 가혹하게 다스렸다. 누가는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아그립바 1세와 페니키아 사람들 간의 적대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행 12:20).

이것은 아마도 도라 항구에서 일어난 사건에 아그립바 1세가 관여해 페니키아인들이 처형당한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로 인해 아그립바 1세와 페니키아 도시들 간에는 얼마간의 냉각기가 있었다. 하지만 페니키아 사람들은 이전에 두로 왕 히람 시대부터 그랬던 것처럼 갈릴리의 비옥한 지역에서 나오는 식량에 의존했기 때문에 아그립바 1세와 오랫동안 반목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그립바 1세의 총리대신인 블라스도의 알선으로 가이사랴에서 열린 대연회에 참석해 아그립바 1세에 대한 자신들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표시했다.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행 12:20).

대연회의 둘째 날 새벽에 아그립바 1세는 은실로 짠 예복을 입고 극장에서 연설을 했는데, 은실로 짠 왕의 예복이 새벽의 태양 광선에 반사되면서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열렬히 환호했다. 그 순간 아그립바 1세는 죽을병에 걸렸는데, 누가는 이를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신적인 영광을 차지한 데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하고 있다. 아그립바 1세는 즉시 집으로 옮겨졌지만 5일 후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현대 의학으로 볼 때 맹장 파열로 인한 복막염으로 사료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아그립바 1세가 54세를 일기로 갑자기 죽자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되었다. 그가 만일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처럼 장수했다면 그가 죽고 나서 수십 년 후에 일어난 재난들을(주후 70년의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 미연에 막았을지도 모른다. 아그립바 1세가 채 7년도 통치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왕국은 다시 로마의 총독령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파견된 총독들의 연이은 폭정은 유대 땅을 돌이킬 수 없는 봉기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클라우디우스는 친구의 아들(아그립바 2세)에게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평소 아그립바 1세를 시기하던 황제의 측근들은 아들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당시 아그립바 2세는 17세로 미성년자였음) 황제의 계획을 무산시켰다고 한다. ---p.124-127

베드로를 위한 변명
할례 문제가 빌미가 되어 안디옥에서 일어난 충돌에 대해 성경은 갈라디아서 외에 달리 언급이 없다. 베드로는 자신이 쓴 베드로전·후서에서 이 문제를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바울이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한 갈라디아서만 가지고 안디옥에서 일어난 충돌을 평가하기 쉽다. 언뜻 보면 바울은 진리의 수호자로, 베드로는 비겁한 타협자로 여겨질 수 있다. 내가 굳이 여기서 ‘베드로를 위한 변명’에 나서는 것은 이를 통해 당시에 발생한 할례 문제를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고보에게서 온 사절단 앞에서 보여 준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 당시 베드로가 처한 진퇴양난의 곤경을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도 분명 바울만큼은 아니었을지라도 복음 전파를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욥바에서 기도하던 중 보게 된 환상과 고넬료 집안에서 경험한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야고보가 보낸 사절단을 통해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바울이 안디옥 교인들 편에 서야 했듯이, 베드로 역시 예루살렘 교인들 편에 서야만 했다. 자신이 안디옥에서 취한 행동으로 인해 유대 지역에서 복음의 진보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한다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자유분방한 태도를 일정 부분 조율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안디옥에서의 충돌은 베드로와 바울, 두 사람이 갖고 있는 기질적 특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성경 인물을 기질로 분석한 팀 라헤이(Tim LaHaye)는 베드로를 다혈질, 바울을 담즙질 기질의 소유자로 해석한다. 강성 기질의 바울이 이 문제를 베드로의 면전에서 대놓고 지적할 수 있었던 데 반해, 아무래도 좌충우돌하지만 기질적으로 여린 심성의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바울보다는 보수적이었겠지만 베드로도 심정적으로는 분명 바울의 책망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안디옥에서의 충돌을 과거지사로 여기며 훌훌 털 수 있을 즈음에는 예전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 이방인 출신 성도들과 자유롭게 식탁 교제를 가졌을 것이다.---p.163-165

네로의 죽음, 그리고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반란군 진압에 투입된 지도 어느덧 1년 여의 시간이 지났을 때 로마에서 엄청난 변고가 일어났다. 네로의 지속적인 폭정은 결국 반란을 초래했고, 상황이 네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원로원은 서둘러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며 시류에 편승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쳐 나가는 쥐들처럼 황제를 호위해야 할 근위대마저 모두 흩어져 버리자 네로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주후 68년 6월 9일).
황제가 죽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계속 전쟁을 벌일 권한을 잃고 말았다. 그는 황제의 죽음 이후 수도 로마의 상황을 살펴야 했고, 새로운 황제로부터 새로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네로가 죽자 로마는 제정으로 넘어간 이후 경험해 보지 못한 극도의 혼미 상태로 빠져들었다. 황제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장군이 차례로 황제가 되겠다고 나섰지만, 이들은 모두 불과 몇 달의 짧은 통치를 마치고 암살되고 만다.
혼미에 빠진 로마를 보며 예루살렘에서 버티고 있던 유대 반란군들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 로마 제국은 곧 붕괴될 것처럼 보였고, 반란이 성공해 다시금 유대인들의 독립왕조를 세울 기대로 가슴이 북받쳤을 것이다. 실제로 마카비 혁명 당시에도 셀류코스 왕국 내의 혼란을 틈타 유대 독립왕조를 세운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소망이 전혀 비현실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그러는 가운데 전쟁은 1년 넘게 중지되었고,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계속 로마의 사태만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혼미 상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상황은 갑자기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네로가 자살한 지 1년이 약간 넘은 주후 69년 7월 1일 이집트 총독인 알렉산더(주후 46~48년에는 유대 총독)가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곧이어 가이사랴, 안디옥에 있던 로마군들이 그 뒤를 이었고, 7월이 끝날 무렵에는 동방에 속한 모든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며 충성 맹세를 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1년도 넘게 중단된 유대 전쟁을 재개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황제 자리를 확실하게 굳히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동방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사회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라도 유대 전쟁을 하루 속히 매듭지어야만 했다. 당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 함락을 아들 티투스에게 맡겼다. 티투스가 이끄는 병력은 지금까지 참전한 3개 군단(5군단, 10군단, 15군단) 외에도 12군단이 추가되어 총 4개의 군단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대군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을 이어 차기 황제가 될 장남 티투스에게 그에 걸맞은 전공을 안겨 주고자 했던 것이다.
주후 70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같은 해 여름 티투스는 아버지가 맡긴 특명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열심당원들이 최후의 항전을 위해 모인 마사다도 이후 3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이로써 주후 66년에 발발한 유대인들의 대봉기는 무려 7년의 시간을 끌다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p.32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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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기만 했던 성경이 이제부터 역사와 지리를 넘나드는 익사이팅한 탐험처럼 읽힐 것이다.
고명진(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성경을 근동 역사, 지리, 고고학을 통해 자상하게 한 걸음씩 인도해 주어 성경 말씀이 눈앞에서 4차원적으로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김상복(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이 책은 성경을 박진감 넘치고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멋진 열쇠를 선물할 것이다.
김유수(월광교회 담임목사)
눈에 번쩍 띄는 책이다. 좀처럼 읽기 어려운 성경을 통으로 묶어 역사 소설처럼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기에 신자, 불신자를 불문하고 관심을 끌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문봉주(《성경의 맥을 잡아라》 저자)
성경의 땅 이스라엘에서의 삶과 경험, 그리고 묵상이 없으면 도저히 태어날 수 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차원의 성경일독 안내서다.
이동원(지구촌교회 원로목사)
빈말이 아니고, 정말 좋은 책이다. 나도 많이 배워야겠다.
이애실(생터성경사역원 대표)
끊임없는 연구와 신선한 통찰력으로 완성된 이 책은 성경연구와 통독의 새로운 역사를 펼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재훈(온누리교회 담임목사)
이 책은 세상과 소통하는 성경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딱딱한 구약성경을 말랑하며 흥미진진한 역사 스토리로 풀어낸 저자의 내공이 돋보인다.
이태형(〈국민일보〉 부국장)
이번 책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 가는 귀한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홍민기(호산나교회 담임목사, 브리지임팩트사역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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