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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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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11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784쪽 | 1159g | 148*210*40mm
ISBN13 9788990024862
ISBN10 8990024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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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그런 회유적 외교가 어디에서나 잘 통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외교는 잘 통제되고 냉혹함이 수반된 경우에만 성공을 거두었다. 로마는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카르타고가 멸망하자 지도상에서 그 도시를 완전히 지워버리기로 작정하고, 파괴된 곳의 땅을 갈고 소금을 뿌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했다. 카르타고가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저 먼 동쪽 흑해 연안의 아나톨리아 지방에도 로마의 숙적인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에우파토르 6세(재위 BC 120-63. 그의 치세에 폰투스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 옮긴이)가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의 지배범위는 한때 지금의 터키 대부분의 지역과 흑해연안에 미칠 만큼 강대했다. 미트라다테스는 소아시아의 이탈리아인과 로마인 수천 명을 살해한 이른바 아시아의 만종 학살사건Asian Vespers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로마는 몇 해 뒤 미트라다테스와 세 차례 전쟁 -‘미트라다테스 전쟁’- 을 벌여 기원전 63년 마침내 한때나마 기세등등했던 그를 크림 반도의 마지막 성채로 내모는 데 성공했다. 미트라다테스는 그곳에서 자결하려 했으나 여러 해 동안 해독제를 써온 탓에 독약이 듣지 않아 경비병에게 대신 죽여달라고 하여 생을 마감했다. --- pp.32~33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만일 4세기 로마인들에게 제국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요소가 무엇이겠냐고 물어보면 두 말 없이 동방의 페르시아를 지목했을 거라는 점이다. 그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300년경 페르시아는 게르마니아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력한 적이었고, 유럽의 다른 국경지역에도 이렇다 할 위협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펠릭스 단이 접하지 못했던 고고학적 증거의 관점에서 사료를 분석해보면, 1세기에 로마 군단이 라인강과 도나우강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은 요란스런 독일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요인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그것은 또 제정 후기 로마가 게르만족보다 페르시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이유이기도 하다. --- p.81

라인강이 로마의 북방경계선으로 굳어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로마의 영토확장에 담긴 동기뿐만 아니라 로마에 정복되기 이전 유럽의 사회적, 경제적 발전수준과 관계가 있다. 로마의 영토확장은 공화정 시대에 벌어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과두의 권력투쟁과 제정 초기 황제들의 명예욕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토확장에 대한 열기는 지중해 일대에 비옥한 땅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때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 지역은 일단 병합이 되면 로마의 세수원이 되고 그와 더불어 정복한 장군의 명예도 덩달아 올라갔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비옥한 토지가 바닥을 드러내자 제정 초기에는 급기야 정복비용도 뽑지 못하는 부실한 토지를 마구잡이로 병합하는 상태가 되었다. 브리튼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고대 사료에도 나와 있듯이, 로마가 브리튼을 정복한 이유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개인적 영예 때문이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서 로마에 정복되지 않은 유럽의 경제발전 수준을 가늠해보면 로마가 왜 굳이 제국의 북방경계선을 라인강으로 정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 p.91

간단히 말해 만족은 로마의 진면목을 일깨워주는 존재였다. 그들의 결점으로 로마의 우월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정당화시켜주는 열등한 사회였다. 로마인은 만족보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라 천양지차로 다른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였다. 로마의 사회질서는 바로 신이 정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그같은 이데올로기는 단지 상류층의 기분만 우쭐하게 해준 데 그치지 않고 제국 기능의 중추를 이루었다. 만족의 위협을 주기적으로 들먹이기만 해도 4세기 로마인들은 기꺼이 세금을 내려고 했다. 3세기에 초래된 위기로 세금이 크게 올랐는데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 p.109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흥기는 로마제국에서 일어난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그러나 기번을 비롯한 다수의 역사가들은 기독교가 제국의 기능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기번이 주장한 대로 기독교 기관들이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또 전에는 부유했던 비기독교 조직이 기독교 세력이 커지면서 부를 징발당하게 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속계의 재산이 종교계로 넘어가는 과정 전반에 기독교가 개입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같은 맥락에서 제국의 노동력을 일부 수도원에 빼앗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봐야 수천 명에 불과해, 변동 폭이 크지 않았던 인구, 아니 오히려 증가 추세에 있던 인구에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재산을 버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의 삶을 택한 상류층 인사도 400년 무렵 제국의 고위관료로 활동한 6,000여 명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였다. --- pp.180~181

하지만 그처럼 특별한 제국 로마에도 결함은 있었다. 원거리, 미개한 통신수단, 자료처리 능력의 한계가 국가 시스템의 역량을 크게 떨어뜨렸다. 로마는 조세문제를 제외하고는 제국의 힘을 이용하려 드는 집단들이 조성해놓은 상황에 끌려 다니며 기본적으로 퇴보를 거듭했다. 경제력도 최저생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제국의 존재로 혜택을 받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극소수 지주들이 국부의 대부분을 독식했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 p.205

훈족의 기원과 그들의 이동 원인은 이처럼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376년 여름 고트족의 도나우강 출현이라는 전략적 격변의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트족은 훈족이 갑자기 흑해 북쪽 연안에 큰 무리를 지어 나타나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이동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훈족은 그때 로마제국에서 피난처를 찾으려고 도망치는 고트족을 따라 도나우 강변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고트족이 제국 영토에 진입하자마자 도나우강 일대를 장악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것이 대부분의 역사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375년에서 376년 사이 훈족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공포에 휩싸인 고트족이 376년 로마제국 영토로 밀려들었고, 그 후 훈족은 도나우 강변의 지배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 p.215

로마 유린의 진정한 의미를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탐정소설을 쓰는 것 못지않게 복잡하다. 시간적으로는 8월의 여름날 그 파멸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후의 20년을 포괄하고 있고, 지리적으로는 동쪽의 카프카스 산맥에서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그것을 기초로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고트족의 로마 유린은 불길한 징조이기는 했으나 제국의 본질적 저항능력을 손상시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pp.270~271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모든 것이 악의 체계로 이루어졌다거나 혹은 세속적 평화를 다 나쁜 것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팍스 로마나는 기독교도들이 하느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왕국에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납득시키려고 했다. “신의 나라는 로마와는 비교가 안 되는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그것은 신의 나라에 승리가 아닌 진리가 있고, 높은 지위가 아닌 거룩함이 있으며, 평화가 아닌 지복이 있고, 생명이 아닌 영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신국의 시민들은 별개의 정치체에 속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를 약탈한 고트족도 때에 따라서는 우리편이 될 수 있고, 로마인도 때로는 적이 될 수 있었다. 신국의 시민들이 세속국가에 바치는 충성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내세에서만 하나로 뭉쳤다. --- pp.326~327

그것은 로마 정치제도 내에 이미 존재하던 단층선이 외부의 군사력으로 인해 균열이 가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라 할 만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와 406년 말 게르만 부족들의 라인강 침범 때도 제국의 사회 저층부 사람들은 만족을 기꺼이 도와주려 했고,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그들에게 합세하려고까지 했다. 그것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들이 지주들에 의한, 지주들을 위한 시스템으로부터 도외시되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주층이 만족과 손잡으려 하는 현상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것은 제국에도 한층 위험한 요소였는데, 알고 보면 그것도 시스템의 성격에 원인이 있었다. 로마제국은 영토만 넓었지 관료체계의 한계로 지주들이 중앙에 세금을 내고 정부군의 보호를 받는, 무력과 정치 담합이 얽히고 설키는 지방자치체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로마세계의 중심에 무장한 외부세력이 등장하자 정치 담합에 큰 부담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몇몇 지주들이 만족 주도의 정부에 재빨리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제정 후기 로마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표출된 현상이라기보다는 토지에 편중된 로마의 부의 특성이 드러난 것이었다. --- p.352

그 정치 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보상이 뒤따랐다.…… 반대로 패하면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로마의 정치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고위층은 항상 적에 둘러싸여 있어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제정 후기 로마 정계의 최고위층에 속한 인물이 정상적으로 은퇴하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었다. 대개는 스틸리코처럼 대리석관에 실려 나오기 마련이었다. 고전적인 형태의 유혈 낭자한 권력투쟁은 특히 황제의 사망과 같은 정권교체기에 많이 발생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장군만 해도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급서 후 처형되었고, 나중에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배후 파벌도 처형되었다. 그럴 경우 당사자만 화를 당하면 그나마 ?행이었다. 운이 나쁠 때는 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스틸리코의 아내와 아들도 그가 죽고 난 뒤 곧 살해되었다. 치욕을 정계은퇴로 끝내는 사람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렙티스 마그나 사건의 팔라디우스처럼 중앙정치에서 밀려나자마자 정적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증거수집과 함께 험담을 퍼뜨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몰라 늘 조마조마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 pp.359~360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제국을 구해준 인물이 바로 서로마제국 최후의 영웅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였다. 앞서 살펴본 대로 그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즉위에 이어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또 그는 젊은 시절 로마 유린 때는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에, 410년대에는 훈족에 인질로 잡혀 있은 경험이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그는 참제 요한네스 정부가 무너진 뒤 훈족의 도움을 받아 정적 세바스티아누스를 제압할 수 있었다.…… 가우덴티우스는 젊은 시절 동로마제국의 관직에 올라 있었다. 그러다 399년 스틸리코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무렵에는 아프리카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그도 콘스탄티우스처럼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 스틸리코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동로마군 지휘관이었다. 이후 그는 막대한 재산을 지닌 이탈리아 원로원 의원의 상속녀와 결혼했고, 410년대 말 갈리아의 야전군 사령관이 됨으로써 인생의 정점을 맞았다. 가우덴티우스는 420년대 갈리아에서 요한네스의 제위 찬탈을 둘러싸고 일어난 폭동 와중에 살해되었다. --- pp.397~398

447년 1월 27일 새벽 2시, 콘스탄티노플에 돌연 지진이 엄습했다. 그 여파로 골든게이트 일대가 파괴되고 육지성벽도 일부 붕괴되었다. 아틸라는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려던 순간 그 소식을 듣고 공격노선을 바꾸었다. 그가 다시 그곳에 갔을 때는 도시가 이미 위기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동로마의 행정장관 콘스탄티우스가 전차경주의 청록 파벌을 동원하여 해자의 잡석을 치우고 성문과 탑들을 재건한 결과였다. 3월 말에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한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처럼 ‘아테네 여신도 그토록 신속하고 훌륭하게 재건하지는 못했을 만큼’ 말끔히 정돈돼 있었다. 훈족이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다다르기 훨씬 전에 도시 점령의 기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결과 훈족은 수도에 대한 공성전 대신 동로마군과 두 번째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동로마의 트라키아 야전군은 지난번 전투에서 훈족에 패해 뿔뿔이 흩어졌으나, 수도 주변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에는 아직 제국의 주력군이 남아 있었다. 이 군대가 케르소네수스에서 훈족과 대결을 벌였으나 역시 대패했다. --- pp.437~438

따라서 훈족의 지배를 받는 모든 민족이 아틸라가 죽자마자 즉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있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게피다이족은 신속하게 자유를 되찾은 점으로 보아 그랬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은 아틸라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새로운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치를 하기 시작했다. 스키리족만 해도 독립왕국을 수립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460년대에 그들은 아틸라의 최측근으로 동로마 당국이 아틸라를 암살하기 위해 매수하려 했던 에데코의 지배를 받았다. 에데코는 두 아들 오도바카르와 오노울프의 도움을 받아 스키리족을 지배했다. 아마도 에데코는 훈족 제국이 무너지자 아틸라의 최측근에서 스키리족 왕으로 재빨리 변신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스키리족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이 스키리족 어머니를 둔 것으로 사료에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스키리족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에데코는 훈족 혹은 튀링겐족으로 사료에 기록돼 있다. --- p.503

훈족 제국의 멸망으로 헝가리 대초원에 몰려 있던 훈족의 방계세력은 라인강 유역과 흑해 연안으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 모두 훈족 계승왕국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계승왕국들은 서로간에 내분을 일으키면서도 로마제국의 국경을 수시로 공격했다. 훈족 제국의 멸망이 로마제국에 미치는 여파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에 따라 도나우강 국경지역에 대한 로마의 외교정책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로마 정부는 두 측면에 정책의 주안점을 두고 새로운 상황에 맞섰다. 하나는 도나우강 북쪽의 세력이 제국 영토로 침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혼란의 와중에 훈족 제국 같은 강대국이 또다시 탄생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 p.516

페르시아는 로마 최대의 적이었다. 로마도 페르시아 최대의 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양국은 상대편과 맞붙어 거둔 승리를 매우 값지게 평가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집트에서 소아시아 서부에 이르는 지역은 동로마제국의 주요 세수원이었다. 따라서 황제들은 그곳의 안정만은 절대 해치려 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기동야전군 병력의 40퍼센트 이상을 페르시아 전선에 주둔시키고, 변경주둔군 92개 부대를 이집트와 리비아에 묶어두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로마 정부가 설령 서로마에 대한 군사원조에 생각이 미쳤다 해도 당장 빼낼 수 있는 병력은 발칸에 있는 변경주둔군의 6분의 1과, 트라키아 및 황제군 사령부에 속하는 기동야전군의 4분의 3 정도가 고작이었다. --- pp.546~547

그동안 학계 일각에서는 당시 제국에 쉽사리 등을 돌린 채 정치적으로 중요한 주변의 만족세력을 상대로 서둘러 신분 재조정 협의에 들어간 로마 지주들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제국에 대한 지주들의 충성심이 기본적으로 결여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나아가 그 관점은 또 서로마제국이 붕괴하게 된 원인의 하나로 꼽혔다. 다시 말해 서로마는 상류층이 정작 제국이 지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토지소유에 신분상의 목을 매고 있던 로마 지주들의 특성을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토지는 부동산이다. 따라서 갈리아와 에스파냐는 물론이고 저 먼 동방의 토지까지 보유한 대부호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평범한 부자들로서는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로서는 주변의 만족세력과 타협하여 재산권을 지킬 방도를 찾든지 아니면 귀족 신분을 버리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 소멸하는 상황에서 로마 지주들은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기를 쓰고 그것을 부여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 pp.597~598

실제로 서로마제국에 종결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세력은 이탈리아 군부뿐이었다. 오레스테스는 네포스를 축출한 뒤 그의 아들 로물루스(재위 475-476)를 제위에 앉혔다. 오레스테스는 지난날 훈족 제국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을 두 차례나 방문했고, 그의 아버지 타툴루스와 장인 로물루스는 440년대 말에 아이티우스와도 막역했던 사이로, 프리스쿠스가 아틸라 궁정에 머물고 있을 때 로마 사절단의 일부로 그곳에 파견되기도 했다. 훈족 제국이 멸망한 뒤 오레스테스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군대에서 승진을 거듭하다 율리우스 네포스에 의해 수석 사령관이 되었다. 로마의 건국시조와 이름이 같은 오레스테스의 아들 로물루스는 475년 10월 31일 서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오레스테스와 그의 형제 파울루스가 쥐고 있었다. 로물루스의 황제 즉위식에서 그에 대한 찬양문 연설자는 제2의 로물루스에 의해 서로마제국의 황금기가 새로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 달랐다. 알다시피 로물루스는 ‘작은 아우구스투스little Augustus’를 뜻하는 아우구스툴루스로 서로마제국 최후의 황제가 되었다. --- pp.605~606

이 모든 과정에서 주역을 맡은 것은 로마 영토를 침범한 외부의 무장세력이었다. 그 후 다양한 만족세력들이 국경을 넘어와 로마로부터 조약을 이끌어냈고, 그런 식으로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 제국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376년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 무리를 제국의 영토로 받아들인 것은 서로마군이 페르시아 전선에 묶여 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만족들은 침입할 때마다 늘 폭력을 수반했다. 그런 다음에는 물론 모종의 외교적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사태를 호전시키기보다는 그저 만족들이 얻은 영토를 확인해주는 데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느 저술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가 없다. 그는 5세기 서로마제국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른바 로마제국의 멸망은 통제를 조금 벗어난 가공의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내러티브 역사라는 구정물에 손을 담그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5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통제를 조금 벗어난 것이 아니라 격렬한 폭력을 수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마제국은 분명 수많은 외부 집단들이 제국의 영토에 정착하고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한 결과 멸망한 것이었다. --- pp.616~617

예나 지금이나 제국들의 지배방식에는 피지배민족의 역반응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끝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제국도 스스로 파멸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씨앗은 여러 세기를 이어오는 동안 축적된 내적 허약함 때문도 아니고 새로 불거져 나온 문제 때문도 아닌 게르만 사회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였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는 근동 사회를 재편하여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게르만 사회도 서구에서 그와 똑같은 일을 벌인 것이고, 훈족 세력과의 충돌로 그 과정이 더욱 촉진되었던 것뿐이다. 따라서 서로마제국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게르만 사회가 로마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제국의 힘에 대응하고 나섰기 때문에 몰락한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착된다. 로마제국의 몰락은 끝없는 공격성을 지닌 로마 제국주의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 pp.647~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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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번뜩이는 지성, 날카로운 분석이 어우러진 탁월한 작품. 지은이는 이야기 구조에 결연한 질서를 부여하며, 패배한 그들과 달리 득의양양하게 승리를 거둔다.
선데이 타임스
격동기 로마제국의 실상이 다채롭고 매혹적인 서술로 완벽하게 되살아난다. 옛 사료의 그윽함과 날카로운 위트, 짜릿한 재미가 가득한 작품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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