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왔네.” 그녀가 말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지면을 니콜은 조금 두려움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끝없는 미래, 머지않아 깨어질 수 있는. 그런 급변을 그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앙드레가 폐암에 걸린다 ?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우다니, 지나치다, 많이 지나치다. 아니면 비행기가 추락해 폭발한다. 상황을 끝내기에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둘이 함께 그리고 별다른 문제없이. 하지만 너무 이르다, 지금은 아니다. 비행기 바퀴가 조금 난폭하게 활주로에 부딪혔을 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또 한 번 목숨을 건졌어.’ --- p.15
“아주 좋아 보이세요.” 마샤가 말했다.
“오 킬로그램 빠졌어. 다시 찌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지. 항상 체중을 재보고.”
예전에는 체중 때문에 염려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맙소사! 자기 몸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체중에 신경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많이 느꼈다. 체중 변화는 그녀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녀는 오래된 연인의 사랑을 조금 잃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그녀를 예전보다 덜 필요로 하게 된 것처럼, 걱정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체중을 관리했다. --- pp.26-27
니콜이 웃으며 말했다. “난 결심하지 않고도 당신을 사랑했어.”
“그땐 내가 젊었잖아.”
“지금도 늙진 않았어.”
앙드레는 반박하지 않았다. 니콜은 그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도 자기 나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치욕스러운 일을 겪을 때면 자주 나이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그는 스스로를 어른으로 여기기를 거부했다 ?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잘못된 신념과 경솔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 교수는, 그 가장(家長)은, 그 오십 대 남자는 진짜 그가 아니었다. 그리고 인생이 그의 눈앞에서 다시 닫혔다. 과거도, 미래도 더 이상 그에게 변명거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육십 대 남자였다. 이룬 일이 아무것도 없는 은퇴한 노인이었다. 다른 일들 만큼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를 스쳐갔던 후회들도 이미 흩어져버렸다. 소르본 대학 교수, 저명한 역사학자, 그는 이런 운명의 무게를 지니게 되리라. 그리고 그 운명은 가벼워지지 않으리라. 추문은 정의된 채로, 만들어진 채로, 멈춘 채로 남는 법이다. 덧없는 순간들이 덧붙고, 은폐물이 생겨 덫을 놓기 때문이다. --- p.35
모스크바는 조금 변했다. 오히려 흉해졌다(그곳의 변화가 사람에게나 장소에나 거의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유감이었다). 넓은 도로를 개통하고 옛 구역들을 철거했다. 차량 통행을 금한 붉은 광장은 더 광대하고 장중해 보였다. 신성한 장소. 안타까운 점은, 예전에는 붉은 광장이 막힌 데 없이 뻗어 하늘과 맞닿았던 반면, 지금은 성 바실리 교회 뒤에 들어선 거대한 건축물이 지평선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니콜은 크렘린의 교회들과 그곳의 성상(聖像)들, 박물관의 성상들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보았다. --- p.38
마샤가 산책을 제안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많이 걸었기 때문에 니콜은 피곤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앙드레와 똑같이 수 킬로미터를 즐거운 기분으로 빠르게 걸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다리 힘이 부친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앙드레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조건 참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람 없는 벤치 하나가 보였다. 드문 일이니 놓치지 말아야지. 그들은 거기에 앉았다. --- pp.52-53
거울 속에서, 사진에서, 그녀의 모습이 시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앙드레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남자인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자신이 여자임을 느꼈다. 그런데 앙드레가 너무나 잘생긴 낯모르는 청년을 데리고 왔다. 청년은 별생각 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그녀와 악수했고, 그 순간 뭔가가 뒤집혔다. 그녀에게 청년은 젊고 매력적인 수컷이었지만, 청년에게 그녀는 여든 살 늙은이만큼이나 무성의 존재였다. 그녀는 자신을 보던 청년의 눈길을 잊지 못했다. 그 일 이후 그녀는 자기 육체와의 일치를 단념했다. 그것은 낯선 허물, 딱한 변장이었다. --- p.70
앙드레가 콧노래로 왈츠음악을 흥얼거리며 마샤의 허리를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앙드레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이상했다. 눈과 턱의 생김새가 닮았음에도, 니콜은 이따금 마샤가 앙드레의 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앙드레는 젊은 시절 니콜에게 건넸던 달콤한 말과 미소로 마샤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들 부부는 서로에게 우정 어린 거친 말투를 조금씩 사용했고, 서로를 향한 몸짓도 많이 무뚝뚝해졌다. 누구의 잘못일까? --- p.76
“저 사람이 정직하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하지만 저 사람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럴 권리가 없는데 말이야.”
마샤가 빙긋이 웃었다.
“두 분이 이렇게 싸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꼭 어린아이들처럼.”
“나이 예순이 넘어서 말이지? 하지만 어른, 심지어 늙은이라는 것이 결국 뭐겠니? 나이 먹은 아이들일 뿐이야.”
바로 그들의 나이 때문에 그가 이 말다툼을 지긋지긋해하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화합해왔건만, 니콜이 화합을 배반했다.
---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