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 윤석남〉(1993, 금호미술관, 서울)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작품에는 ‘여성=어머니의 힘’이라는 주제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윤석남은 이 개인전에서부터 버려진 목재를 조립하여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고 조각하는 기법을 취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버려진 목재의 거친 옹이나 구멍, 검은 얼룩과 균열처럼 보통의 조각가들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결함을 그대로 살려서 여성들의 마음의 고통과 제한된 행동 등을 표현하는 신체의 상처로 절묘하게 바꾸어놓은 것이다.
--- p.27~28
윤석남은 이 전시회에 신작 〈핑크 룸〉을 출품했다. 마루에 핑크빛 비즈를 촘촘히 깔고 갈고리가 튀어나온 소파와 의자에 동화된 여성, 나무판 모양의 여성을 배치한 설치는 2000년까지 이어지는 연작에 등장한다. 이전까지 어머니 세대 여성의 고뇌와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힘을 그려온 윤석남은 이 연작에서 자기 세대의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현대에도 어머니 세대와 마찬가지로 행동과 마음이 속박당하여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내면을 표현했다. 이 〈핑크 룸〉 연작에는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이 지닌 강인함이나 힘은 없고, 기이한 형광색 핑크와 번쩍대는 나전의 목판과 새틴 천으로 표현된 옷이 보여주는 허영의 아름다움과 허무함이 드러난다. 바닥에 흩어진 비즈 때문에 비틀대거나 넘어지는 불안정함이 덧붙여져 오히려 여성 내면의 유약함과 광기에 이르는 고뇌가 강조되었다.
--- p.31
“사람들이 버린 개들을 거두어 기르는 이애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필요할 때 데려왔다가 싫증이 나면 생명체를 물건처럼 버리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개는 태생이 사람과 같이 살게 되어 있는 동물이다. 개가 우리에게서 얻는 것보다, 우리가 개에게서 얻는 것이 더 많다. 버림받은 생명들의 슬픔과 외로움에 대한 연민이 뭉쳐져 〈1,025〉의 계기가 되었다. 연민. 존중보다도 내게는 연민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불쌍하다. 그러나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 p.44
형광 핑크를 통한 자아 반추의 고통스런 시간은 [블루 룸]의 청색 모티브와 [빛의 파종] 전시 등을 준비하며 점차 희망과 도전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중섭미술상 수상 기념전으로 1997년에 열린 이 전시에서 윤석남은 [999]를 발표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999개의 여성 소형 목상들은 각양각색이며, 같은 크기도 모양도 없고 똑같은 인물도 없다. 이것은 이름 불리지 못한 채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살다 간 수많은 여성 선조들이 집단 소환된 현장이다. 여기서 빛은 과거를 밝히고 이들의 몸을 자유롭게 분산시켜 파종하는 수단이다.
--- p.93~94
“이전에 작업실이 아파트 지하실에 있었다. 아파트 주변엔 버려진 가구들이 많다. 그 버려진 가구들을 보면 안타까웠다. 버려진 것들에서 간혹 반짝거리는 것들을 주웠다. 그것을 주워다가 내 작품에 집어넣어서 빛을 주고 싶었다. 버려진 창틀을 주워 와서 깨어진 유리들을 붙여 보았다. 그런 작업을 통해 폐쇄된 공간에 갇힌 여성들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의자 등받이에 여성들의 얼굴을 끼워 넣기도 했는데, 그럴 땐 아마 닫힌 공간에서 떨어져나가고 싶은 욕망을 반대로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미술로서 고상해진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사실 삶은 천박하지, 고상하지 않다. 나는 내 작업으로 고상하다는 아우라를 깨고 싶었다. 오히려 비천한 것들을 그대로 갖다 써서 현재 우리 인간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 p.117~119
어머니를 그림으로 그리던 그는 어머니를 나무에다 새기기 시작했다. 평면이 싫어지더라고 했다.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의 작업이 지루하고 부담스럽고 어딘지 어색하더라고 그는 말했다. 꼬무락 꼬무락거리면서 만드는 것이 하고 싶더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나무에 그린다 했다. 우리 어머니들이 꼬무락거리면서 하던 일을 그는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색채로는 절의 단청이나 나무 상여에 붙어 있는 장식들, 무당집에 가면 느껴지는 색들에 손이 가더라고 했다. 원초적이라고들 하는 색인데 왜 끌리는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대모신의 비법을 따르고 싶은 것은 아닌지? 자신을 찾아, 여성성을 찾아 길 떠난 윤석남은 지금 위에서 논의한 여성 문학인들이 서성이는 언저리 어딘가에서 탐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