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지금 우리들은…
백전백패 - 이것이 수없이 누비고 다녔던 취업전선에서 내가 올린 전과였다. 잔뜩 기대를 했던 회사에서 연락이 없을 때마다, 퇴근하는 선배나 친구들을 만나서 술잔을 나누고 싶었지만 외판원이 아닐까 하고 지레 겁을 먹을까봐 내 스스로 연락을 끊었고, 다음 날의 면접을 위해 술집 대신에 피부관리실로 달려가서 속으로 울던 나였지만, 한번 밀리기 시작한 전선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신병들이 해마다 밀려들어서, 졸업한 지 3년이 지났을 때는 노병도 아니고 전역도 아닌 전사자 취급이었다. --- 「드라이브인」 중에서
말년엔 비바람 막아 줄 오두막 한 칸도 없어서 일엽편주에 가재도구 담아 싣고 물결 따라 떠돌다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도 흔들리는 조각배 속에서 맞이하셨던, 무주택자들의 원조(元祖)이자 시성(詩聖)이신 두보(杜甫)선생이 저 꼴을 보셨다면, 이런 말씀 한 마디는 하셨을런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家,價,苛,加,街. 집값이 혹독하게 올라서, 거리로 나 앉았네. --- 「가가가가가」 중에서
"내가 저승을 가 봐서 하는 소리지만도 저승에는 일본이 없다. 무슨 말인고 하믄, 저승 주민으로 등록을 할 때 이름을 한문으로 쓰믄 무조건 중국송장으로 취급 하는기라. 지가 아무리 '내는 동경출신 아소(麻生)요!', '나도 일본 사람 고이즈미(小泉)요!' 하고 버텨봤자 이름이 한문이라서 씨가 안 묵히는기라!... 그라이께네 일본은 다른 거 다 제껴 놓고 한문 안 들어가는 나랏말부터 만들어야 된다꼬... 그래서 나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원상 복구해야 된다는 주장을 계속 해 오는 기라!" --- 「독도의용조사단」 중에서
II: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삼만 평 남짓한 저수지에 새카맣게 깔렸던 사람들이 어느덧 몇 십 명 단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걸로 봐서, 그들도 과거의 직장단위로 뭉쳤음이 분명했다.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고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돼버린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얼어붙은 시베리아의 유형지 같은 장소에서 만났으니, 술 없이는 그 동안의 안부조차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각기 자신들의 썰매에 소주 서너짝 씩은 담아 싣고 있었으니, 평소엔 술을 전혀 못했던 주부들도 겁 없이 받아 마시고 눈이 풀려 가고 있었다. 술이 들어가면 언제 어디서나 으레 시끄러워지기 마련인데 그들은, 악상(惡喪)을 당한 상가의 조문객들처럼 묵묵히 어묵 안주에 술병만 자빠트리면서 눈시울이 벌게지고 있었다. --- 「IMF 시대의 얼음낚시」 중에서
III. 세월이 하수상하여
시시각각으로 모습이 변하는 구름 속에서 그리운 아이들의 얼굴도 보이고, 지난 망년회 때 다퉜던 친구의 얼굴도 떠올랐다. 과음한 내가 언성을 높이자 역시 제 주량을 훨씬 넘기고 있던 친구가 "육두문자는 맏상제 태어나서 옹알이 할 때나 가르쳐라!" 하고 기름을 부었다. 참을성 없고 속도 좁은 나는 그 얼마 전에 개인전을 열었던 그에게 "네가 그린 꽃이 그게 진정한 꽃이냐? 지금 제대로 된 꽃이 어디 있다고 허구한 날 매화타령이냐? 조화(弔花)에는 향기가 없듯이 지옥도에도 꽃은 필요 없어!" 하고 술상을 엎고 나와 버렸다. --- 「꽃」 중에서
IV: 이 사람들 좀 보소!
"무직유죄(無職有罪)고 유사무죄(有士無罪)여!"
안전화가 끓어 넘치는 라면을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무직유죄는 알겠는데 유사는 뭐야?"
털모자가 주머니에서 꺼낸 소주 한 병을 종이컵 세 개에 따르면서 말했다.
"유력인사의 준말이야!"
"젠장, 그런 말은 옛날 고려 적부터 있었고, 몇 년 전에는 지강헌이란 탈옥수가 동료들 하고 신촌의 어느 가정집에서 제 머리에 권총 들이 대고 "시발놈들아!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이 좆같아서 못 살겠다!" 하고 악을 쓰다가 죽어갔는데, 그 당시는 조용하다가 요새 갑자기 그 말이 부쩍 뜨는 이유가 뭐야?..." --- 「여의도 이야기」 중에서
V. 사람과 사람 사이
산 위에서부터 내려 온 땅거미는 숲 속의 식구들을 모두 불러 들였고. 부엉이 우는 소리에 다래골도 길었던 하루를 접고 있었다. 저녁 내 끊이지 않던 별장의 웃음소리도 마침내 잦아들고, 외등의 불빛에 홀린 나방들은 날개를 다치면서도 자꾸 날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서 상수리나무에 앉았던 부엉이도 날아가고, 구름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보름달만, 썩어 가는 황쏘가리가 검정고무신 한 짝과 앞서거니, 뒤거니 하며 계곡물에 떠내려 오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다래골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