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하면 떠오르는 무협지. 고등학교 때 어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국문과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로 무협지를 집필했고, 필명이 사마달이었다고 한다. 당신과 같은 출판사 소속으로 사마달 필명을 사용한 아르바이트생이 족히 10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적지 않은 무협지들이 그런 식으로 '양산'되었다.
휘익~~, 으흑, 퍽, 아~~~! 이런 말 몇 마디로 한 페이지를 넘길 수도 있는 즐거운 아르바이트! 뻔한 스토리, 천편일률적인 인물 묘사와 성격 설정, 그러면서도 독자를 빨아들이는 그 기묘한 매력!
무협 또는 유협의 전통, 무협지 식으로 말하면 강호의 전통은 현재 영화나 무협지에만 남아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이 중국사의 전개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중국사의 밑바탕에 자리잡은 민간 전통으로서의 유협은, 혼란의 시기마다 표면으로 분출되어 역사의 방향을 트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촉한을 세운 유비 집단의 역정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모택동 집단의 장정은 무척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그들 집단의 내적 결속은 유협의 의리 정신에 가깝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추진한 여러 정책들 가운데 유협 또는 임협 집단을 척결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 국가의 통치권 혹은 법질서 바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새로 통일 제국을 수립한 진시황제의 입장에서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제국에 들어와서도 유협의 활동은 여전했다. 예컨대 삼국지의 관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의협심에서 혹은 청탁을 받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등, 요즘말로 하면 해결사 역할까지 했다. 결국 이리 저리 도망 다니다가 유비, 장비와 만나게 되는데, 소설 삼국지의 인물 설정과는 달리, 실제로는 장비가 삼형제 중에서 지식인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여기 소개하는 책은 바로 중국의 무협 또는 유협 전통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자랑한다. 단순히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니라, 중국 문화 일반, 사상, 문학, 중국인의 심성, 중국사 일반 등의 광범위한 맥락 속에서 무협 전통을 논하는 보기 드문 책이다. 중국 고대의 상무(尙武) 습속에서부터 김용의 무협 소설에 이르는 긴 시간 축을 주제로 삼는다.
모든 장이 훌륭하지만, 특히 제7장 "협(俠)과 중국 문화정신" 부분이 백미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중국, 일본, 서양의 무협 전통, 그러니까 협사, 무사, 기사의 전통을 다각도로 비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다.
'중국 문화의 협의(俠義) 전통과 서양의 기사 문화, 일본의 무사 문화의 성질은 모두 다르다. 서구의 기사 문화는 상층 사회의 귀족문화이며, 일본의 무사 문화는 상하층 사회의 중간에 위치하는 문화이다. 그리고 중국의 무협 문화는 거리나 마을에서 활약하며 초야에 몸을 숨긴 순수한 하층 사회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었고, 신의를 중시했으며, 명리를 경시하고 의로운 기개를 중시했다.
서양 기사의 기사 정신은 의무를 가장 우위에 두는 가치관념이었다. 일본 무사의 가치관념은 특정 단체나 조직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으로 집중 표현되었다. 중국 무협의 가치관념은 순박성을 표현하고 있다.
중국 무협은 서구의 기사처럼 사회의 어떤 추상적인 종교 정신이나 진리 신조, 행위 규범에 대해 무슨 의무감이나 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는 충동적인 것이어서, 자신의 이익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자신의 위에 군림하는 군주나 심신을 속박하는 집단을 위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중대한 직책이나 의무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가치관념은 소박하고 우연적인 감정 요소 가운데 생성되었다." (이상 pp.341~349 일부)
중국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흥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교양과 재미의 조화를 바로 이런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무협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무협소설이란 무엇인가>(예림기획)를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협객의 칼끝에 천하가 춤춘다>(강효백 지음, 한길사)도 읽을 만 하다. 강효백의 책은 태평천국, 신해혁명, 인민공화국까지 포괄하여, 보다 넓은 시야에서 중국의 무협 전통을 역사적으로 개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