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고학적 성과의 수준으로는 옥저 - 동예 내의 자세한 민족집단 간의 비정은 큰 의미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서기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 동해안 지역에 경질무문토기문화가 급속히 확산된다는 점이다. 기후 한랭화를 극복할 수 있는 크로우노프카문화의 적응잠재력은 주변에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여기에 낙랑군이 설치되고 그에 따른 다른 행정조직이 환동해 지역에 설치되어 지역의 사회체 성장에 이바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회의 발전은 곧 연해주~한반도 강원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서로 비슷한 문화요소를 지닌 문화권으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과연 어디까지가 옥저이고 동예인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들이 하나의 문화권(cultural sphere)에 속하며 그는 바로 위지 동이전을 비롯한 사서에 등장하는 옥저와 동예라는 이름으로 환동한 지역의 사회집단으로 생각된다. 즉, 가원전 3~2세기대에 옥저 문화권은 한반도 동해안 지역으로 확산되어 기존의 청동기시대 후기문화를 대체했다고 본다. 중도식 토기문화는 서기 3~4세기까지 이어져서 이 지역의 원삼국시대 대표적인 문화로 이어진다. --- 강인욱, 「동아시아 고고학·고대사 연구 속에서 옥저문화의 위치」 중에서
단결-크로우노프카가 옥저 혹은 북옥저로 비정되고, 러시아에서도 옥저족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브로단스키, 1987). 그러나 『삼국지(三國志)』는 3세기 중반에 진나라의 진수(陣壽)가 3세기 중반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지 동이전의 동옥저조에는 한무제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년)에‘옥저성으로 현토군을 삼았다’라는 기사로 보아 기록으로 확인되는 옥저의 상한은 올려보아도 기원전 2세기부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 전 시기가 옥저로 비정되기보다는 기원전 3~기원전 1세기로 판단되는 단결-크로우토프카문화 Ⅱ기 정도부터 볼 수 있다.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의 이주 현상을 환경변화와 관계한 연구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해, 크로우노프카인들이 남하한다는 것이다.(보스트레초프, 2005). 물론 이러한 시각에서 Ⅱ기부터 해안가로 소멸되고 해안가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상태에서 해안가로도 확산되는 것은 좀 더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 김재윤,「동북한과 중국 연변지구의 초기 철기시대 문화 -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의 계통적 성격」 중에서
모든 연구자가 크로우노프카인의 생태경제가 아주 다양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생계경제 형태는 크로우노프카인의 수요에 의한 농경과 가축업 같은 2차 산업과 자연물을 소비하는 채집·수렵·어업 등의 1차 산업이 있다. 농경과 가축업이 생기기 이전에는 채집·수렵·어업의 생계활동이 지배적이었다. 초기 철기시대의 경제는 내부적인 요인 아래 농경 부문과 수렵채집 부문이 서로 밀고 당기며 농경과 수렵채집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주시홉스카야, 2004, 183~184쪽).
크로우토프카문화의 농경에 관한 문제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에 대두되었는데, 직접적인 증명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유선광방식을 이용하여 재배된 곡물 자료를 유적에서 추출할 수 있었고, 크로우노프카유적에서 농경이 행해졌음이 증명되었다. --- N. A. 클류예프,「러시아 연해주 남부 크로우노프카문화의 연구현황」 중에서
한반도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약 801여 점의 무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반도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무문토기 가운데 호류토기가 제일 큰 비중(491점, 약 61.2%)을 차지하는데, 다음으로 수량이 많은 것은 발류토기이다. 발류토기는 198점이 출토되었으며 다른 토기 중 약 24.7%를 차지하고 있다. 시루와 두형토기가 소량 발견되었으며, 각각 약 3.6%와 1,1% 정도에 불과하다. 파수부 토기가 모든 토기 중 약 5.1%를 차지하며, 주로 발류토기, 호류토기 중 외반구연 무경식호, 그리고 다공식시루에 파수를 붙인 것은 알 수 있다. 또한 파수가 따로 발견된 예가 많으며 총 64점이 있고 약 8%에 달한다.
--- A. L. 수보니타, 「한반도의 중도식 토기문화와 크로우노프카문화의 비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