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바다의 벽」이,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가 당선되었으며 2012년 제2회 혼불문학상 『프린세스 바리』가 당선되었다. 그 외 소설집 『목공 소녀』가 있다.
옷을 갈아입고서야 느긋하게 혼부라를 즐기며 본정으로 갔사외다. 옷을 갈아입은 후로 저희를 돌아보는 남자들이 또래가 아님을 알아차리었습니다. 적어도 정복정모를 한 전문학교 학생이었고, 나팔바지에 통이 넓은 넥타이에 맥고모자를 쓰고 단장을 짚고 있는 모뽀들이었사외다. 저희는 기분이 더욱 느긋해져 신사들이 보내오는 눈길에 웃음으로 답하며 걸었습니다. --- pp.31-32
『고등형사 미와』와 『경성의 영웅, 트로이카』는 아니었지만 딱지본을 만들어낸 기술이 비슷해 같은 출판국에서 찍어낸 듯한 『연애 독본』을 압수했다. (…) 직원은 총독부로 돌아가 오후 반나절 만에 책을 읽었고 그것을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줬다. 공식적으로는 에로와 그로가 사회를 타락시킬 수 있으니 풍기문란죄로 딱지본을 찍어낸 출판국과 저자를 찾아달라고 협조 공문을 보냈지만 실질적으로 세 권의 딱지본을 출판한 출판국과 『고등형사 미와』와 『경성의 영웅, 트로이카』의 저자, 한제국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 pp.57-58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가슴을 이렇게 후벼 팔 수 있소? 겨우 세 시간을 같이 있었던 계집애 때문에 쩔쩔매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소. 그 애는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리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꽃잎을 욕망하는 괴상한 정신 상태, 감정이 낯설고 두렵소. 그럼에도 하얘진 머릿속으로 계속 그 애를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생각뿐이오. --- p.69
참혹하고 비통하지만 이것이 저의 첫 경험기이외다. 이 비참하고 가혹한 첫 경험을 아까운 종이에 써내려간 연유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제씨께서는 저와 같이 제 발등을 찍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기 위함이외다. 작년 12월에 발간한 여성잡지 『신가정』에 실린 연애 십결을 덧붙이나니 독자 제씨께서는 잘 읽고 숙지하여 똑똑히 행동하시길 바라외다. 연애 도중에 상대자에게서 절망을 느낄 때는 칼 같은 마음을 먹고 단념할 일. 저는 그 문장에 밑줄을 새카맣게 긋고 그어서 종이가 뜯겨져 나갔더랬습니다. --- pp.114-115
세 명의 여학생은 문간방을 나섰다. 한복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 치마를 무릎 위까지 바짝 올려 입은 세 명의 여학생은 대문 앞에 활짝 핀 불두화 곁을 지나쳤다. 유난히 창백한 얼굴이었던 정희가 골목 중간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했다. 아란과 경숙은 정희 곁으로 다가가 등을 두들기다 서로 어깨를 감싸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먼저 울음을 터트린 정희는 앞으로 닥칠 고통으로, 경숙은 만나주지 않는 남자에 대한 원망으로, 아란은 거절당한 소설의 비참함으로 울었다. --- p.143
하늘의 달과 별과 같이 늘 쳐다보이는 자리에 박혀 있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 저는 순간적인 쾌락이 아닌, 변함없이 유지되는 단단한 사랑이, 참연애가 있다고 믿고 싶사옵니다. 평소 소녀구락부의 회원인 저희들은 연애 십결을 달달 외웠사외다. 연애를 하려면 제대로 된 똑똑한 연애를 하고 수동적인 것이 아닌 주도적인 연애를 할 것이라 결심하였사외다. 또한 참연애는 찬성하지만 속연애(俗戀愛)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사외다. --- p.162
“그녀에 관한 일이네.” 고 형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녀, 라니. 저고리에 통치마를 입은 여학생에게 그녀, 라 부르는 그의 입을, 목을 비틀고 싶었다. 나는 사무실의 서랍을 모조리 열었다. 디자이너 박 군의 책상 서랍까지 죄 열어보았다. 쇳조각이라도 있으면 사용하리라. 서랍을 뒤지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독한 감정을 끝내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내 고통을 스스로 끝내는 것. 고 형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 pp.177-178
엄마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내가 만나보지 못한 외할머니의 처녀 시절을 상상해보는 작업은 즐거웠다. 여느 할머니들과는 달리 허리를 나무도마처럼 편평하게 펴고 손을 휘젓지 않고 걸었던 외할머니의 소녀 시절을, 아란이 머물던 공간으로 데려와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