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부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상수지 적자, 즉 소비와 생산의 격차가 국내총생산(GDP)의 7퍼센트에 가까운데다가 갖가지 공적 지급의무액의 규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지금의 미국과 같은 나라가 채권을 발행했다면 그 채권을 주저하지도 않고 사는 투자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인들보다 미국경제의 실태를 더 잘 파악했어야 할 해외의 투자자들마저 미국경제의 악화된 상황에 대해 눈을 감았다. 이로 인해 미국 재무부채권의 발행잔액 가운데 해외에서 소유하고 있는 비중이 2006년에 42퍼센트를 넘어, 불과 6년 전의 30퍼센트에 비해 12퍼센트포인트나 확대됐다. ---p. 24
사람들은 ‘파생상품’이라는 말을 들으면 멀뚱멀뚱한 표정을 짓는다. 금융의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생상품이란 월스트리트의 금융공학 전문가와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자기와는 무관한 어떤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파생증권’으로도 불리는 파생상품은 금융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사실 차입자가 사정에 따라 월상환액을 달리 정할 수 있는 신축적인 상환조건의 저비용 주택담보대출과 같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혁신적인 금융상품들 가운데도 합성의 과정을 거쳐 창출되는 파생상품을 이용한 것이 적지 않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주식시장, 고정수익증권시장, 일차산품시장 등에서 파생상품이 오래된 표현으로 ‘개의 몸통을 흔드는 꼬리’가 돼버렸고, 이 점이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상당히 큰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 ---pp. 73~74
2006년 중반까지는 미국경제가 골딜록스 경제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나고 보니 그 기간에 많은 관찰자가 유감스럽게도 고전적인 오산을 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플러스 수치들과 마이너스 수치들을 모두 합하면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건전한 평균의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걸어서 건너고자 하는 낯선 강의 밑바닥에 깊이가 6미터가 넘는 웅덩이가 몇 군데 파여 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하고 그저 평균수심이 1.2미터라고만 알고 속도 편하게 그 강으로 무심히 걸어 들어가는 여행자의 태도와 비슷한 것이었다.
당시에 이미 어느 곳을 보아도 2001년 이후의 경제회복 추세에 대한 낙관적인 이야기와 그런 추세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게 할 만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p. 92
경제적인 고통이 더욱 심해지면 사람들이 범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며, 사실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악당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와해되는 자산시장의 틈새 구석구석에 사기와 횡령의 증거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알고 보면 거품의 시기에 이익의 충돌에 의해 왜곡된 엉터리 가치평가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진 자산운용이 많았음이 드러날 것이다. 무능함, 탐욕, 사기행위 등이 원인이 되어 헤지펀드, 보험회사, 증권회사를 비롯한 수많은 금융회사가 도미노 쓰러지듯 잇달아 파산하게 되면 사람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다.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사람들이 용서하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보복의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p. 128
재앙이 경제위축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으로 확산되면 부의 파괴와 사람들의 궁핍화가 전개되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것이다. 위기의 이 두 번째 국면은 대체로 채권자, 부자,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이런저런 방식으로 뭔가를 축적해놓은 사람 등을 주로 덮칠 것이다. 특히 초인플레이션의 영향이 극적인 형태로 폭넓게 파급될 것이다. 위기의 첫 번째 국면에서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현금, 사업, 금융자산이 위기의 두 번째 국면에서 또 다시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p. 155
사람들은 또 다시 뒤늦게야 세상이 장밋빛으로만 보이게 하는 안경을 벗어던질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위험이 이론적으로는 분산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소수의 금융회사들에 집중됐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런 금융회사들 가운데는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금융회사들도 있을 것이고, 또 그 가운데 일부는 미국 전체의 지급결제 인프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금융회사들일 것이다. 미국인들은 매우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위험이 쪼개지고, 분리되고, 뒤섞이고, 연결되고, 재배분되면서 미국의 금융 전체가 파악할 수도, 관리할 수도 없는 것이 됐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될 것이며, 특히 여건이 악화되는 시기에는 이런 깨달음이 절실하게 와 닿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구조가 단순한 신용위험일 뿐이었던 것이 어느 사이에 신용위험, 금리위험, 거래상대방위험, 경영위험 등이 혼합된 치명적인 폭발물이 돼버렸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은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pp. 167~168
그러나 정보전달의 시차와 세계경제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더 나은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징후를 알아볼 수 없게 가려버리는 경우에는 시나리오별로 각각 어떤 태도와 조치가 적절한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 경우에 도움이 될 만한 전략이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최선의 상황을 희망하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누구나 이 영원한 격언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무책임하고 성급했던 과거의 후유증에 갇혀 있을 때 나만이라도 현실의 난관을 극복해내려면 엄청난 용기와 끈기와 결의가 필요할 것인데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내면에서 끌어낼 수밖에 없다. ---p. 207)
사실 과거의 오류와 과잉이 시정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오래 묵은 지혜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분명히 그 진가를 보여줄 것이다. 예를 들어 분산투자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다만 투자에 관한 전문적인 조언자들이 흔히 말하는 이유에서 분산투자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러 단계에 걸쳐 경제와 금융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각종 자산의 가격은 급변하더라도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고, 이 때문에 위험을 여러 자산에 분산시켜 놓는다고 해서 투자수익률의 변화가 반드시 평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돌발적 시장교란이 자주 일어나는 세계에서는 이보다는 오히려 재무적 안전을 도모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방식의 분산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p. 220
개인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두루 들어맞는 조언을 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인식하고, 그 개인적인 상황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고, 세심하게 계획을 세우고, 규율 잡힌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는 말은 할 수 있다. 가장 우선적인 원칙은 장기적인 생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는 곧 고수익의 가능성보다는 안전성, 유동성, 투명성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복잡한 것보다는 간단한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실행하기도 어렵고 한 문장만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투자보다는 간단하고 평범한 투자가 대체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파생상품과 관련되거나 차입금을 이용하는 투자전략은 그것에 내포된 위험에 비해 수익의 잠재력이 압도적으로 더 큰 경우가 아닌 한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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