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에서 약간의 술기운이 느껴지는데다, 연이은 거절에도 작정한 듯 계속 전화를 해대는 폼이 영 수상했다. 이 아저씨, 왜 이러는 걸까? 일단 순수한 의도로 해석하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가까운(혹은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웃에 대한 단순한 호의이거나, 싱글맘 가정에 대한 배려(또는 동정?)의 표현이거나.
사실은 아이만이라도 보내라는 말에 잠시 흔들렸다. 아니, 헷갈렸다.
‘그 집 고기가 정말 그렇게도 맛있나?’
이럴 때 이것저것 안 따지고 쪼르르 달려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속이 편할까! 그럴 수만 있다면 머리라도 아프지 않을 것을…. 고기 맛도 못 보고 머리만 아픈 이유는 딱 하나다. 돌싱이 되고 나서 생겨난 무주공산 콤플렉스 때문이다. ‘임자 없는 빈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주인 아닌가! 돌싱녀를 대하는 남자들의 심리가 열에 여덟아홉은 그 짝인 듯해서다. 물론 정말로 진지한 감정을 품고 그러는 남자도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런 순정남은 희귀종이므로 논외로 치고 말이다.
가끔 나를 만나겠다며 우리 동네로 찾아오는 남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 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준 적은 없었다. ‘혹시나’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 동네를 방문했던 남정네들은 실망한 얼굴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어도, 그 남정네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어 밥값, 커피값, 술값 등을 지불했으니, 그들 덕분에 우리 동네의 지역경제가 발전한 면도 조금은 있다고 위안 삼아본다.
가끔은 ‘아이’를 걸고넘어짐으로써 초점이 ‘어미’에게 맞춰진 것이 아닌 양 쇼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아저씨가 그런 케이스 같은 거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굴자니, 그 아저씨가 아이의 이름은 물론 학교와 학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행여 나한테 앙심을 품고 아이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런 악질적인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것. 이런저런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도, 그 아저씨와 마주 앉아 고기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무주공산 콤플렉스-두배로부동산 김 사장의 대시」중에서
- 애인이 없다고? 혼자 산 지 꽤 됐잖아?
- 정말 없어? 안아주는 남자가 하나는 있어야지! 내가 소개해줄까?
- 아냐, 소개해주지 마. 나는 어때? 나, 아직 쓸 만한데!
- 네가 애인 노릇하게? 히히. 그나저나 애인 없는 돌싱들은 외로워서 어떻
게 사나 몰라.
- 그러게. 어떻게 해결하지? 그냥 굶는 건가?
- 혹시 성인용품 쓰나? 내가 사줄까? 어떤 걸로 사줄까?
분하고 분하도다. 이런 무례한 이야기를 듣고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 마디 쏘아붙이지 못했으니. 사람이 너무 당황해도 이렇게 바보가 되나 보다. 입 거칠고 야한 농담 좋아하는 이들에게 돌싱녀는 딱 좋은 먹잇감인가. 성희롱을 해도 쫓아와서 멱살잡이할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굶는지 안 굶는지 궁금해 하던 그들, 다른 남자들처럼 노골적으로 지분거리지 않아서 점잖은 축에 속하는 줄 알았더니, 나를 대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던가 보다. 자기들 마음대로 남의 사생활을 이리저리 상상해본 것은 물론이고, 각자 ‘구상’도 해본 눈치들이었다. 애인 없는 돌싱녀라니까 일단 장기적인 ‘결식’ 상태로 판단하고 말이다. 그래, 세상에는 결식아동만 있는 게 아니었다! 먹어야 할 것을 못 먹고 사는 결식 어른들도 차고 넘치는 세상인 거다!
내내 잠 못 이루고 씩씩거리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불을 켜고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혹시라도 얼굴에 ‘고픈’ 기색이 있어 보이나? 혹시라도 ‘굶주려’ 보이는 얼굴빛인가? 그들이 나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 혹시 내 표정에 궁기(窮氣)라도 흘렀기 때문일까?
---「식색동원(食色同源)의 이치-결식 아줌마의 과대망상」중에서
적당한 고독은 나를 단련시켜 주리라 믿지만, 그래도 아직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고독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바쁘게 지내는 수밖에. 그래서 때로는 한 시간 단위로 촘촘히 일과표를 짜서 실행에 옮겨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생활계획표 같은 그런 것을.
지금의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세월이 가면서 은둔의 터널을 조금씩 빠져나오고 있긴 하지만, 천성이 사교적이지 못한 탓에 사교계는, 언감생심, 근처에도 못 가보고 있다. 그나마 변화가 있다면 시대 흐름에 발맞춰 조심스레 SNS를 시작해본 것 정도랄까.
SNS에 게시되는 글들을 보노라면 각자의 삶의 양식과, 삶에 대한 각자의 태도가 읽히기 마련이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더듬거리는 식이라 해도 그렇게 서로 상대를 유추해가며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재미는 재미다. 남에게 감추려 해도 저마다 감춰지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 아니, 오히려 남에게 감추려 할수록 더욱더 드러나는 것들이 있으니.
‘눈팅’만 하던 초창기를 지나자 차츰 남의 글에 댓글을 남겨 보게도 되었다. 내 댓글에 누가 반응을 보이면 그것이 또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점차 SNS에 머무는 시간이 늘더니, 언제부턴가는 내 이야기들을 짤막하게 올려 보게도 되었다. 처음에는 사회?문화 분야의 관심사들을 주로 언급했다면 요즘에는 내 생활과 고민을 조금씩 내보이는 중이다.
싱글맘의 애환이 담긴 글에 SNS 친구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내왔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혼자 힘으로 먹고살기 힘들다고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데도 남녀 공히 ‘부럽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더 복통을 호소하곤 한다. 그 속내가 궁금해서 들여다보면, 열의 아홉은 나의 ‘싱글’ 상태 그 자체를 배 아파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자유(무슨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내가 부러워 죽겠는 거다.
가끔은 낯선 사내들로부터 쪽지가 날아오기도 한다. 나이, 직업, 거주지, 키와 몸무게, 연봉, 건강 상태, 취미 등이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행 대출 액수와 상환 계획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투는 하나같이 친절하고 정중하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제출해오는 이들은 한결같이 나의 전화번호를,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1:1 만남이 가능한지를 알고 싶어 했다.
유감스럽게도 쪽지 전형에 통과되어 면접 전형까지 성사된 경우는 없다. 왜? 채용 계획 자체가 없으므로. 내게 있어 SNS는 ‘디지털 해우소’일 뿐, 오프라인 활동을 도모하기 위한 매개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의 공개 범위를 조정한다든지 쪽지 차단 기능을 쓴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교통정리를 해나가고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SNS 친구들은 내가 남의 도움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삶을 개척해가는 것에 박수를 보내준다. 그들이 ‘힘내라’는 댓글을 달아줄 때, ‘좋아요’를 눌러줄 때, 응원의 이모티콘을 보내줄 때, 나는 힘을 얻는다. 세파를 헤쳐 나갈 힘을. 외로움을 견뎌낼 힘을.
그래서 SNS는 내게 ‘로맨틱’한 매체는 아니지만 ‘성공적’인 매체인 것!
---「not 로맨틱 but 성공적- 나의 SNS 서포터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