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과산화수소수를 담았던 채색 유리병에 염산을 가득 채운 뒤 여차하면 어떤 놈의 면상에다 뿌릴 생각으로 염산병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 내 생각의 칼날을 벼려주는 호박색깔의 부식성 액체를 담은 이 유리병을 수중에 품은 뒤부터 묘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마리는 그 산성 액체가 결국에는 내 눈, 내 시선에 뿌려지지 않을지 아니면, 바로 자기 얼굴, 몇 주 전부터 줄곧 눈물에 젖어 있는 자기 얼굴에 뿌려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녀의 불안감도 어쩌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니라는 시늉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아니야, 마리, 그렇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 있는 배불뚝이 유리병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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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이 몰려오거나 가는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처럼 마리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마리는 흐르는 눈물을 참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으면서 눈물을 뺨 위로 보란 듯 드러내며 흘러내리게 했다.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울고 있는 마리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바로 지진에 관해 이야기란 것을 알고 있었다. 지진은 이제 우리 사랑의 종말과 뗄래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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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펜지, 바이올렛,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고 한 발자국도 더 가지 않았고 지겹고 지치고 절망한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끝장내기 위해 염산을 꽃 위로 부었고 꽃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끔찍한 악취와 함께 단숨에 오그라들고 움츠러들면서 위축되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연기를 뿜는 화산구와 이 무한히 작은 재앙의 근원이 나였다는 느낌을 빼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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