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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6년 03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177쪽 | 310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72753520
ISBN10 8972753521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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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에 과산화수소수를 담았던 채색 유리병에 염산을 가득 채운 뒤 여차하면 어떤 놈의 면상에다 뿌릴 생각으로 염산병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 내 생각의 칼날을 벼려주는 호박색깔의 부식성 액체를 담은 이 유리병을 수중에 품은 뒤부터 묘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마리는 그 산성 액체가 결국에는 내 눈, 내 시선에 뿌려지지 않을지 아니면, 바로 자기 얼굴, 몇 주 전부터 줄곧 눈물에 젖어 있는 자기 얼굴에 뿌려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녀의 불안감도 어쩌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니라는 시늉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아니야, 마리, 그렇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 있는 배불뚝이 유리병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 p.9
밀물이 몰려오거나 가는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처럼 마리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마리는 흐르는 눈물을 참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으며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으면서 눈물을 뺨 위로 보란 듯 드러내며 흘러내리게 했다.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울고 있는 마리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바로 지진에 관해 이야기란 것을 알고 있었다. 지진은 이제 우리 사랑의 종말과 뗄래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 p.106
야생화, 펜지, 바이올렛,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고 한 발자국도 더 가지 않았고 지겹고 지치고 절망한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끝장내기 위해 염산을 꽃 위로 부었고 꽃은 피어오르는 연기와 끔찍한 악취와 함께 단숨에 오그라들고 움츠러들면서 위축되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연기를 뿜는 화산구와 이 무한히 작은 재앙의 근원이 나였다는 느낌을 빼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169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패션 디자이너인 마리와 마리의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모든 걸 끝장내기’ 위해 염산병을 챙긴다. 마리는 내게 묻는다. “왜 내게 키스하지 않는 거죠?”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마리에게 키스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키스하겠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마리는 내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는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사랑을 어긋내버릴 거란 걸 예감한다. 한밤중 팩스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데스크로 내려간다. 데스크에 안내자가 없어 나는 호텔용 슬러퍼를 신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도쿄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꼭 원시 자연 같다고 생각한다. 팩스를 가지러 다시 데스크로 내려간 나는 팩스를 읽고 있는 마리와 마주친다. 마리 역시 슬리퍼 차림이다. 그리고 자신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우리의 사랑에 불길한 징후가 느껴진다. 우리 둘은 호텔에서 나와 도쿄 거리를 활보한다. 편의점에 들러 우동도 먹고 양말도 사 신는다. 밤새 내린 눈이 녹아버려 땅은 질척거리고 마리와 나는 추위에 덜덜 떨며 택시를 기다린다. 우리의 예감을 증명하듯 택시기사로부터 승차 거부를 당한 나는 마리와 다툰다. 그리고 곧 지진이 일어난다. 출근하던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거나 쪼그려 앉아 공포에 떨고 마리와 나 역시 지진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호텔로 돌아온 마리와 나는 패션쇼를 위한 회의에 참석하고 나는 교토에 있는 베르나르의 집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이틀을 보냈을까. 마리가 보고 싶다. 마리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진 나는 한밤중 마리의 전시회장을 찾아간다. 여전히 한 손엔 염산병을 든 채. 전시회장에서 마리의 영상을 본 나는 밖으로 나와 어느 누구도 아닌 꽃에 염산을 뿌리고 서사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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