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사랑해.’ 발갛게 볼을 붉히며 조그맣게 그리 속삭였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한때 제 손에 들어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적. 그때 제 몸을 꿰뚫었던 전율 같은 충족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 품 안에 들어왔던 그녀의 향에 취해 홀리듯 그리 토로했던 순간마저도 그는 그 기적이 오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와 그는 사는 세계가 달랐으니까. 제게는 그녀만이 유일할 것이나 그녀에게는 제가 결코 유일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괜찮았다. 적의 몸으로 감히 자에게 사랑 운운할 수 있었던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그러니 충분히 만족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했던가? 주먹 쥐었던 손바닥에 파고든 손톱이 살갗을 뚫고 피를 내었다. 눈앞이 새빨갛게 점멸하는 착각에 륜은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가 변덕을 부려 저를 가르치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몇백, 몇천 번이나 세뇌하듯 되뇌었다. 그녀가 온전히 제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더 욕심부려 뺏기지나 말자고 생각해 왔으나 어찌 그것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저는 이미 제 마음을 송두리째 상대에게 넘겨 줘 버렸는데 그럼에도 상대에게 유일무이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언제나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 평생을 제가 상대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상대에게 그런 불안에 대한 그 어떤 확신도 받지 못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견딜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그대를 믿어.’ 그리 달콤하게 속삭이는 입술을, 수줍게 웃음 짓는 눈동자를, 깃털처럼 가볍게 손등에 얹어 오는 손을 어찌 다른 이와 공유해도 괜찮다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은 언제나 그 이상을, 좀 더 온전한 것을 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서진휘와 멀어져 가는 세희의 뒷모습을 보며 륜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원한다. 지금이야말로 똑똑히 깨달았다. 다른 사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 독점하고 싶다.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사실은 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형태는 다르게 변해 왔을지라도 언제나 원해 왔다. 이것이 당신께 최선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신께서 내게 줄 것은 깊은 원망과 독약 같은 애증뿐일지도 모르고 나와 함께 있어서 당신은 불행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한 발짝, 두 발짝, 내딛기 시작한 발걸음은 이내 경보가 될 정도로 빨라졌다. 그러나 원한다. 미칠 듯이 원한다. 이렇게 당신을 떠나보내야 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 생각할 정도로. 당신을 원한다. 당신을 놓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