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부채는 단순히 개인이 가난해서, 집이 가난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가난 또한 내가 빚을 져서 생긴 것도 아니고, 내가 대학원에 진학해서 생긴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는 20~30대들에게 ‘대학밖에는 길이 없다.’고 강요하고, ‘빚을 내서라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지시하기 때문에 모두가 대학에 가야 한다고 믿는다. ‘대학만이 살길’이라고 가르치는 학교, 부모, 주변 사람들. 대학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라고는 대학밖에 모르는 이 사회가 청년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고 채무자로 만들고 있다. 대학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빚을 지게 하는 것이 문제다.”
--- p.서문 중에서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사람이 8년 동안 생활하는 데 드는 기본 생활비용이 약 2억 원. 놀랍지 않은가? 2억 원은 20~30대 직장인이 8년을 꼬박 일해도 모으기 힘든 액수다. 그런데 대학 다니는 데만 2억 원을 쓴다니! 가능한 일인가? 이런 불가능한 일이 대학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믿기지 않는 것은 금액만이 아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차렸겠지만, 가상의 인물 하은이는 나를 모티브로 삼았다. 나는 졸업하는 데 10년이 걸렸으니 하은이보다 2년 동안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살았다.
한국에서 대학생이 된다는 건 이 정도로 많은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갓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으며, 그 부모들은 어떻게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나처럼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2억 원을 쓴다? 아마 자녀 대학교육에 이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을 부모가 안다면, 뒷바라지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거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2억 원이 넘는 돈을 마련하고, 이 비용을 지불하며 살았을까?
--- p.28~29
아림 씨의 이야기는 1980년대 후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2000년 중반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IMF를 겪으며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자녀의 대학진학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해 보고자 노력했던 한 가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자금 대출이 연체되면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 보았지만 불안정한 삶의 연속이었다. 아림 씨를 만났을 때,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미대를 다녔기 때문에 졸업전시회를 준비해야 했고, 그에 대한 비용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한 사안이었다.
아림 씨의 부모는 자녀가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가족과 본인의 입지를 살리고, 가족경제를 다시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자녀의 대학입시에 투자하고, 그것을 부모의 의무로 생각했다. 이러한 의무감에는 자녀가 대학 졸업 후에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 p.44
계급적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사교육 과열은 더 강화되는데, 부모는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생존’ 전략 중 하나로 보고 자녀의 입시교육에 매진한다. 사교육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체감하면서도 내가 그만두면 내 아이는 처질 테고, 다른 부모들은 계속 사교육을 할 거라는 불신이 불안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에 따르는 경제적 빈곤이나 압박은 감수해야 할 일이라 여긴다. 자녀에게 좋은 정보를 얻어다 주는 일로 스스로 ‘적절한 엄마’와 ‘그렇지 않은 엄마’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교육은 모두가 파국으로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은 분수에 맞지 않는 개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는 구조적인 경제 위기를 개인이나 가족 안에서 해결하고 대처하도록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삶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각자 알아서 재량껏 살아남아야 비로소 승자로 인정받는 삶 말이다.
--- p.55
“부채 이력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학자금 대출을 받은 횟수가 여덟 차례라는 것이다. (중략) 내가 학자금 대출을 착실하게 납기일에 맞춰 (학자금 대출) 상환을 한다면, 앞으로도 11년 후인 2027년이 되어서야 다 갚을 수 있다고 부채 이력서는 말한다. 그때 내 나이는 마흔 정도가 될 것이다.”
--- p.74
심지어 대출을 받고 상환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채무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자금 대출’을 세련된 금융상품으로 포장해 선전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건 다른 대출과 다르다. 교육비로 빚을 지기
때문에 당연한 거다.’라고 생각한다. 학자금 대출은 ‘교육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 다른 대출이나 금융부채와는 다르다고 여기는 것, 이러한 오인화는 사회적으로 ‘채무자’라는 낙인에 대해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것이자, 교육비를 부채로 마련하는 구조를 양산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 p.120
학자금 대출은 금융의 성격을 지닌 복지이거나, 복지적 성격을 지닌 금융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논리에 의해 굴러가는 것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복지는 분배와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고, 금융은 시장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복지와 금융은 공존할 수 없는 특성을 지녔음에도 한국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관계가 되었다. 학생이나 학부모가 생각하는 학자금 대출도 ‘복지’와 ‘금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학자금 대출이 금융영역에 속하지만, 동시에 복지적 혜택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을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채무자’로 인식한다. 어느 곳에서도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 돈을 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채무자가 되더라도, 빚지는 것을 일종의 특혜이자 수혜로 여긴다.
복지와 금융, 이 불편한 동거는 비단 교육영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특히 IMF 이후 교육, 의료, 주거, 노동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영역에서 복지와 금융은 새로운 사회통치 관리기술로 등장했다.
--- p.164
“대출을 받은 학생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자신은 알바도 두세 개씩 하고, 삼각김밥만 먹고, 돈만 생기면 빚 갚는 데 쓰는데 사람들이 요즘 청년들은 개념이 없어서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도 안 갚으려고 한다고 말한다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중략) 하지만 고성장 사회에서 일한 만큼 돈을 축적하고, 살림살이도 하나씩 장만하고, 대학만 나오면 취직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과 경제관으로 오늘날 청년들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미 사회는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었으며, 과소비를 하느라 대출을 받고 저축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학자금 대출금이 너무 많아서 월급의 대부분을 빚 갚는 데 쓰고, 취직을 하더라도 월급이라고는 겨우 최저임금이 넘는 정도에, 취직해서도 계약 갱신이 안 되면 바로 실업자가 된다.”
--- p.178~180
상철 씨는 대학원에서 밥을 먹을 때 느꼈던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사례처럼 소속집단의 경제적 수준이 높거나 높지 않더라도 본인이 일상적인 소비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밥을 먹는 것, 밥을 사 달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부담을 느낀다. 대학에서 일상적인 소비품목은 개인의 경제적 상황과 형편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 때문에 잘 드러내지 않지만, 소비가 계급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상철 씨가 겪었던 곤란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부채 문제는 빌리고 상환하는 것 자체만으로 겪는 어려움이라기보다 빚과 함께 삶을 조율하는 일상생활 자체가 재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다. 굶주림이 익숙해진 삶, 밥 한 끼에 마음 졸이며 눈치를 보는 삶 속에서,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의 전 영역에서 스스로 단속하며 살아간다.
--- p.196
지난해 서용구 교수는 ‘1985~2015년 서울지역 대학생 빈곤화’ 연구를 발표했다.23 이 연구는 지난 30년 동안 서울에 사는 대학생들의 상황이 열악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연구는 ‘ULI(University student Living Index) 지수’를 활용해 서울 지역 물가와 아르바이트비(과외비)의 변화를 추적했다.
이 지수는 1985년 0.72에서 1995년 0.42로 낮아졌다. 그리고 2015년에는 0.21로 떨어졌다. ULI 지수는 1.0에 가까울수록 학생들이 스스로 경제활동을 통해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좋음을 나타낸다.
한 인터뷰에서 서용구 교수는 2015년 대학생들이 매년 부모로부터 1400만 원 정도 지원을 받아야 졸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는 대학생들이 벌 수 있는 수입에 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훨씬
늘어났음을 보여 준다. 그러니 아무리 일을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원)생이 경험하는 빈곤의 특징은 도시생활자의 빈곤과 겹친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대학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단기적인 일자리, 즉 아르바이트라고 하는 일시적인 수입원에 기댈 수밖에 없다 보니 생활도 안정적일 수 없다.
--- p.198
개인의 삶이 유예되는 것은 곧 사회 또한 유예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을 초래한 사회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이 유예적인 존재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일이다. 유예적인 삶(suspend life)이란, 어떠한 결정을 그다음으로 지연시킨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무언가에 매달려 있는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족과 독립된 개인 사이에서, 학생과 노동자 사이에서, 대학사회와 노동사회 사이에서, ‘학생-채무자’는 부채와 함께 살아간다. 이러한 구조는 학생이 관계와 사고를 ‘가족’과 ‘학교’를 넘어 ‘사회적인 몸’으로 확장시켜 가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한다. 이때 ‘빚’이 있다는 것은 자신을 더 단단하게 묶는 밧줄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유예된 상태에 안주할 수 있는 변명이 되기도 한다.
이들에게 학자금 대출이란, (다른 사람에 비해) ‘뒤늦은 출발선’에 선다는 것을 직면하게 하는 것이자 대학 밖으로 나올 시기가 되면 두렵고 겁나게 하는 것이다.
--- p.246
한국은 지식의 쓸모와 필요를 강조하면서도, 그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과 시스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국외로 유학을 많이 떠나는 이유는 적어도 한국보다 더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내 박사들을 고용하는 데도 야박하며, 공부하는 기간에도 알아서 돈 벌고, 공부하고, 살아남으라고 강요한다. 한국에서 더 이상 학자들이 재생산될 수 없다면, 학계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해로운 일이다.
대학원생에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공부하라고 강요하고, 원하는 주제에 맞춰 연구할 경우 연구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강제하고, 때로 이력을 볼모로 적은 연구비용을 책정해서 연구자를 빈곤으로 몰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발상은 그동안 한국사회가 얼마나 지식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취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어떤 환경에서 지식을 생산하는지 모른 척하면서 말이다. 불평등한 구조에서 노동착취는 일상화되고,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등과 인권, 존엄과 사회적 가치를 말하는 지식이 생산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교육의 가치가 모두에게 이로운 것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그 가치를 만들고 다듬어 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 p.23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