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보로비츠카야 망루를 쏜살같이 달려서 지나쳐 크렘린 궁의 자갈 도로를 지나가자 타이어에서 큰 북소리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노란색과 황금색 크렘린 궁을 지나쳐서 유백색 아르한겔스크 성당 주위로 가서 아치문을 통과해 동그란 초록색 지붕이 있는 의사당 마당으로 들어갔다. 도미니카는 마음속으로 전율했다. 크렘린. 장엄한 건물들, 금박을 입힌 천장들, 높이 치솟은 홀들, 사기와 무시무시한 탐욕과 잔인함이 서까래까지 가득 차 있는 곳. 배반의 궁전. 이제 도미니카(또 다른 종류의 배반자)가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무표정한 얼굴을 핥으러 이 궁전에 온 것이다. --- pp.40-41
도미니카는 코로 숨을 쉬면서 푸틴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봤다. 모호한 기억 속에서 흐루쇼프(1894~1971, 소련의 정치가-옮긴이)가 냉전 시대에 즐겨 쓰던 저속하고 무식한 협박이 떠올랐다. ‘너에게 쿠지카(갑충류의 하나로 곡물의 해충을 뜻함-옮긴이)의 엄마를 보여줄게.’ 그 말은 ‘널 죽일 거야’란 뜻이었다. ‘흠, 대통령 각하, 쿠지카의 엄마를 불러보시죠.’ 도미니카는 생각했다. ‘내가 당신에게 벌을 줄 테니까.’ 입속에서 구리 맛이 느껴지고, 목구멍까지 꽉 찬 날카로운 비밀, 그녀의 가슴속에 얼음처럼 차가운 다이아몬드가 된 그 비밀은 바로 CIA가 SVR에 심은 새로운 내부첩자가 그녀라는 사실이었다. 이 파란 눈의 비단뱀도 그건 모르고 있었다. --- p.45
네이트의 일. 내부 작전, 과학, 기술, 그리고 모스크바, 베이징, 아바나, 테헤란 같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정보원들을 만나는 마법을 부리는 게 그의 일이다.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방첩 국가에서 정보원들을 관리하는 일. 그런 나라에서 정보원들을 만나는 것은 타닌처럼 검고 피라냐로 가득 찬 풀 안의 물살을 헤치고 걸어가면서 밑바닥을 휘젓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것과 같다. --- p.117
네이트는 한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가명을 디바가 직접 올가로 골랐다고 말해줬다. 올가 프레크라스나, 아름다운 올가, 중세 슬라브족의 전사 여왕으로 수백 마리의 참새들의 발에 유황을 묻힌 끈을 달아 날려 보내서 적의 수도를 파괴한 그녀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땅거미가 질 때 하늘을 빙글빙글 돌며 날아다니던 새들이 시내 곳곳에(처마 밑에, 다락 안에, 헛간 안에, 건초더미 속에) 자리를 잡았고 연기 나는 유황이 마침내 연소해서 동시에 수백 개의 불을 내서, 도시를 죄다 불태워버렸다. ‘불과 파괴를 몰고 오는 스패로우라니.’ 한나는 생각했다. 올가 프레크라스나. 아름다운 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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