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내 과거를 내려놓으려 한다. 이 책의 출간은 내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천도재이다. 소대에 망자의 유품을 태우듯이 이 한 권에 기록된 기억의 편린들을 불꽃 속에 던진다. 연기가 되어 말끔히 사라지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답답하게 갇혀서 발버둥치던 모든 의구심들아! 나를 구속하고 압박하던 모든 망념들아! 이제 나를 떠나라. 연기가 되어서 떠나라. 가장 작은 것이 되어서야 가장 큰 세계를 만나는 저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윤회를 끊어라. --- p.4
난 늘 이 길을 지나다니면서 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를 지나 가장 어두운 거리로 들어서서 나의 집, 움막 같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늘 우스꽝스런 연극 같기만 하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 움막 속에는 가장 나에게 적합한 안락과 풍요가 깃든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난 거기서 밤새 에너지를 충전하여 아침이면 화려한 거리로 나오곤 했다. 화려한 거리에서도 가장 화려한 장식품을 파는 가게의 가장 화려한 방으로 가서, 가장 부유층의 여인들을 상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를 찾아오는 대개의 여인들은 자기의 부를 드러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의 허영심을 부추겨 참으로 인간의 생존과는 무관한 값비싼 보석을 팔아야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나는 가족의 생계를 겨우겨우 꾸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도대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날마다 나는 몽유병자처럼 꿈 속 세상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 거리에서 배척당한 사람일 것이다. 도대체 생존과는 무관한 상품들로 북적대는 이 거리, 불필요한 욕망이 비누거품처럼 일어나는 이 거리, 나는 아마 살아생전 이 거리에 진열된 상품의 수요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심에 서서 그들에게 욕망의 거품을 일으켜야하는 중개자임에는 틀림없다. 이 거리의 사람들에겐 내가 이방인이고 나에겐 이 거리가 통째로 이방세계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묘히 공존하고 있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 p.46
고통을 잊으려고 눈을 홉떴을 때, 가로등에 어린 수많은 눈송이 중에 한 송이의 눈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좀쑥부쟁이꽃 만이나 했다. 그것을 지켜봤다. 고요히 바람을 견디며 아주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불빛이 흐려지는 지점에서 놓치고 말았다. 내 시선은 잠시 흔들리며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헤매면서 다시 가로등 근처로 가 눈 한 송이를 잡고 그것을 주시하며 따라가다 어둔 허공에서 놓치고, 놓치는 순간, 다시 가로등 근처로 가서 또 한 송이를 잡고 또 그것을 놓치고……. 하염없이 그러고 있던 어느 순간, 나는 보았다. 그 작은 눈송이가 바람에 자기를 전부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옹골차게 견디고 있는 것을. 그저 바람에 내맡긴다면 바람은 순식간에 눈송이를 가루로 부서뜨릴 것이었다. 내 몸은 저 무수한 눈송이 중에 한 송이 눈과 다르지 않았다. 그 때 난 어떤 음성을 들었다.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였을까. 허공이었나? 아니면 내 안의 어디였나? 분명히 나는 들었다. 바람에 섞인 나지막한 음성.
“그것을 타라. 세상의 모든 빛깔과 소리와 움직임이 하나로 봉인된 그것을 타라. 성난 파도가 뱉어 내는 한 방울의 포말을 타듯이, 지축을 흔들며 용트림하는 폭포의 물줄기로부터 튀어 오르는 작은 물방울 하나를 잡아타듯이 그것을 타라. 타라, 타라, 타라…….” --- p.49
나는 벌떡 일어나 작은 돌 하나를 집어 연못으로 던졌다. 퐁당 소리를 내며 돌멩이가 물 속으로 사라졌다. 돌멩이가 떨어진 곳으로부터 무수한 동그라미가 물이랑을 이루며 퍼져나가다가 천천히 지워졌다. 내가 방금 던진 돌멩이는 연못의 수면을 흔들고 사라졌지만 연못은 아까의 그 연못이 이미 아니다. 물 속은 돌멩이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 뒷전소용돌이로 잠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파문으로 잠시 큰 숨을 쉬었을 게다. 바닥에 숨죽이고 가라앉았던 무수한 침전물들도 부유하며 떠올랐을 것이다. 잠시 오염된 듯 보이지만 저 소용돌이를 통해 연못은 조금 정화될는지 모른다. 아니다. 오염과 정화의 구분은 없다. 변화가 일었음에 틀림없다. 연못은 그 가슴에 돌멩이 하나를 더 안았다. 나는 일어나 천천히 일주문을 나섰다.
그 후로 줄곧 절에 갈 기회가 없었다. 휴일도 없이 나는 일을 했고 어쩌다 쉬는 날에는 잠이나 실컷 자두었다. 점차 깨달음이라든가, 기도라든가 하는 문제는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오히려 깨달음은 허구인 것만 같았고 과거의 기억도 미래의 상상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철저히 현실에 몰입하도록 자신을 다잡았다.
새를 보면 새를 만나고자 했고 벌레를 보면 벌레를 유심히 살폈다. 바람이 불 땐 바람의 냄새와 손길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다 하더라도 내 마음의 환영인 과거와 미래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내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했다. 결국 나 자신은 기억의 산물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로 귀환하여 모든 사물을 인식시켰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의견과 주장이 앞장섰다. 끝없이 환영에 시달리는 게 내가 찾은 나라는 정체의 전부였다. --- p.87
아이는 커서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이제 그 아이가 제기하는 의문은 대학에 왜 가야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등학생인 자녀를 둔 학부형 거의가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자 한다. 무엇을 전문적으로 익히려는 목적도 아니고 어떤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도 아니다. 사회가 대학 졸업자들을 우선 기용하기 때문인가? 그렇다고도 한다. 하지만 꼭 그것만도 아닌 듯하다. 최근 대졸자보다 전문대나 고졸인 젊은이의 취업률이 훨씬 높은 것을 보면. 소위 말하는 3D 업종에 종사하는 걸 꺼리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대학 졸업자가 자진해서 청소부를 하고자 하고 포장마차를 하고자 하며 보수가 좋으면 위험한 직종도 마다하지 않는다니까. 가령 고학력자인 삼대가 청소부를 한다는 걸 방영하면서 직업의 귀천이 사라진 현상을 매스컴에서는 바람직하게 보도하고 있다. 불법 체류 외국 노동자들을 정리하고 그 자리를 우리의 젊은이들이 채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일수록 자기 자식만은 관리자의 계급에 당연히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체노동이 아닌 정신노동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사회인인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자식을 최소한 중간 관리자는 만들어야겠다는 목적으로 대학에 자식을 밀어넣고자 하는 것만 같다. 날로 경쟁이 치열하다. 그럼에도 그 자식이 중년 쯤 되면, 그가 무슨 일을 해서 사회에 얼마큼 공헌하고 그는 얼마나 자기 삶에 만족한지 보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아파트 평수는 얼마나 되는지를 따지며 저울질을 한다. 그러한 시대의 모순에 끝없이 회의하면서도 난, 나 한 삶조차 그 모순으로부터 건져 올릴 자신이 없다. 아직도 간절히 기도하고 열망한다. 아이가 학교공부에 충실하여 그저 평범한 대학에라도 들어가기를.
하지만 아이에게 꼭 대학에 가야한다는 주장을 펼 수가 없었다. 그 애가 이제 제가 판단해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냥 나는 그 애의 보조자일 뿐, 그 애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반대하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했다. 그런데 아이는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바로 패스트 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란다. 거기 가면 신이 난단다. 빵도 굽고, 닭다리도 튀기고, 청소도 하고, 손님에게 주문도 받고, 아이스크림도 뽑아 주고,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팀워크도 기막히게 잘 맞는다나. 그런 일들이 그렇게 재미있고 신이 난다는데, 그것은 미래가 없다고 완강히 반대하면서 아일 학교로 학원으로 돌려보낼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일까? 정말로 그런 일들에서는 아무런 지혜도 얻을 수 없고 그 어떤 미래도 보장 받지 못하는 것일까? 정말 그럴까?
--- pp.257-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