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관련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는 참된 진지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감스럽게도 재능이다.”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헤밍웨이가 얘기했듯이 글쓰기에는 절대적으로 재능이 필요하지만 ‘재능 없음’ 결론이 이미 난 상황에서 내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요즘 말로 웃픈(웃기지만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유감스럽게도 재능은 없지만 다른 무엇보다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단연코 말하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니 더 늦기 전에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첫 번째 원칙은 ‘휴대북(Book)’이다. 휴대북은 휴대폰에서 빌려 온 개념인데 항상 휴대폰을 들고 다니듯 책을 들고 다니자는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책을 읽든 읽지 않든, 손에 들든 가방에 넣고 다니든 항상 책을 갖고 다니자는 것이다. ‘책을 갖고 다니다 보면 반드시 읽게 된다’는 독서 애호가들의 조언을 적용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이어 빼든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이다. 이 책은 내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잠시 동안 모든 걸 멈추고 현 체제의 본질과 유지 원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냉철히 고민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쁜 일상에서 내가 속해 있는 체제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해 지금 이 순간, 『멈춰라, 생각하라』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일단 정지’할 것을 제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빨간불, 잠깐 멈춰서야 한다.’
강연에서 내가 먼저 언급한 책은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나는 본인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읽은 것처럼 대화가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독서의 목적이자 진실이라고 피에르의 말을 인용했다. 소위 지식인, 또는 교양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책을 읽지 않고도 그 내용을 능히 파악하는지, 아닌지로 구분된다는 피에르의 주장도 전했다.
2015년 10월 마지막 주를 나는 ‘부코스키 주간週間’으로 정했다. 우리는 흔히 독서 주간, 과학기술 주간, 관광 주간, 가정 주간 등을 정해 그 의미를 되새긴다. 나는 3일 동안 제주 출장을 가는데 출장 전후 한 주를 찰스 부코스키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기로 했다. 그리고 그 주간을 내 맘 속에 부코스키 주간으로 정해 선포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마디로 지지부진하고 어설픈 지식, 즉 죽어 있는 몸뚱어리에 살아 있는 심장을 가진 통쾌한 사나이의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조르바는 우리 사회의 우스꽝스러움을 단박에 깨는 인물이다. 그는 지식을 비웃지만 누구보다 지혜로우며, 신을 조롱하지만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믿음을 지니고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앎’이라는 그물에 뒤얽혀 가누지 못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나는 이를 ‘임계점 독서’라고 말하고 싶다. 임계점은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다른 상태로 바뀌는 지점의 온도 또는 압력’을 말한다. 즉,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99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임계점을 돌파하는 독서를 해야 새로운 도약이 가능하다. 매일 그렇고 그런 책만 읽어서는 발전이 없다. 자신의 정신세계의 임계점을 뛰어 넘는 독서를 해야 진정한 독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독서는 독자로 하여금 책 읽기를 통해 변하고 행동할 것으로 요구한다. 그래야 독서의 의미가 실질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책만 읽고 변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냥 읽은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독서는 독자가 실존적 의미를 깨닫고 자아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래서 정혜윤은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이렇게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는 ‘짬짬이 독서법’ 또는 ‘자투리 독서법’이라고 이름 지어 본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책을 읽는 것이다. 나는 보통 서울 출장이 잡히면 그날 독서 계획을 세운다. 그날 책 한 권을 읽는 것을 목표로 삼고 ‘오늘의 책’을 정한다. KTX를 기다리며 읽고, 기차 안에서도 읽고, 지하철을 기다리며 읽고, 지하철 안에서도 읽고, 가끔은 목적지에 도착해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한 권을 읽게 된다
글쓰기 방법과 관련해 강원국 작가는 명료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경험한 일화’를 바탕으로 글을 쓰면 세상에서 유일한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작가인 톨스토이, 헤밍웨이처럼 수없는 퇴고 과정을 거치고, 괴테처럼 처음에 오랜 시간을 갖고 글을 작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헤밍웨이가 말했듯 ‘모든 초고는 쓰레기’일 뿐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몇 가지를 제시했다. 자신의 경험을 쓰고, 최대한 많이 쓰고, 그 중에서 일부를 추리고, 충분한 검토 과정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요즘 나는 나에게 맞는 ‘덕후 작가’는 누구일까 생각해본다. 헤밍웨이일까? 밀란 쿤데라인가? 아니면 부코스키일까? 조르주 페렉, 로맹 가리는 또 어떤가? 같은 맥락에서 나의 ‘덕후 철학자’ 후보도 한번 떠올려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떨까? 쇼펜하우어나 에픽테토스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수상록을 쓴 몽테뉴가 자꾸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것도 아니면 공자인가? 도올 김용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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