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싫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 시선이 늘 그 사람을 향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리 악착스러울까? 저 사람은 왜 저리 치사할까? 저 사람은 왜 저리 주책이 없을까? 저 사람만 아니면, 나는 훨씬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만남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제 시선이 ‘싫은 그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을 싫어하는 나’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 일어나는 싫은 마음, 짜증스런 마음, 두려운 마음 등을 세심히 관찰합니다.
예전엔 ‘싫어하는 마음’이 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싫어하는 내 마음을 지켜보고 돌봐주는 마음’이 저임을 압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저인 줄 알았을 땐, 싫은 마음이라는 파도가 일면 거기 함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싫은 마음의 파도를 저를 찾아온 손님으로 맞아들입니다. 싫은 마음은 그대로 있지만, 거기에 공간이 생겨납니다. ‘그 사람을 무척 싫어하는 저’를 향해 미소 지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러한 유머 공간이 생겨나면, 싫은 마음은 예전처럼 저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어느새 싫은 마음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바뀌어 있는 저를 봅니다. 이젠 그가 가여운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가여운 마음이 일어나자,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그의 상처와 고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늙음이 저에게 준 선물의 하나는 대머리입니다. 벌써 오래전에 뒷머리가 휑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터벅머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내가 대머리가 되다니….’
하느님이 저를 특히 예뻐하셨는지 저는 유달리 일찍 대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머리는 저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시간에 판서를 할 때도 학생들이 제 휑한 뒷머리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아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저는 대머리에 대한 저항을 그만두었습니다.
‘에이,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빨리 빠지는 거야? 머리 빠진 내 모습이 정말 싫어!’
제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대머리는 더 강한 힘을 갖고 저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대머리에 저항하면, 머리카락이 새로 돋아나 대머리가 아닌 나가 될 것인가?’
답은 뻔합니다.
‘아니, 내가 대머리에 저항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대머리다. 단지 저항할 경우, 나는 고통스러운 대머리일 뿐이다.’
대머리일 것인가 아니면 대머리가 아닐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대머리인 나’는 이미 발생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며, 나의 선택은 ‘대머리인 나에게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대머리인 나를 받아들일 것인가?’입니다. 대머리인 나에게 저항하면, 대머리인 나는 점점 더 나를 지배하게 되고, 나는 대머리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머리인 나를 받아들이면, 나는 여전히 대머리이지만 대머리가 나를 지배하는 힘은 약해지고 대머리로 인한 고통도 적어질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까요? 물론 후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머리인 저를 받아들이고 제가 대머리라는 사실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저는 대머리인 채로 대머리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 p.24
저는 낯을 많이 가립니다. 낯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어김없이 마음이 불편하고 힘듭니다. 낯선 사람들과의 회합에 가기 전부터 고통이 시작됩니다. 낯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누군가와 짝을 이루어 앉아 어색한 마음을 이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마음공부를 시작하면서 저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사람들과의 회합을 앞두고 고통스런 마음이 들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오늘 한번 화끈하게 어색해보자!’
‘어색하면 어색하자.’라고 마음먹고 난 후부터 상황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사람들과의 회합에 참석하면 여전히 어색합니다. 하지만 어색함을 받아들여보니 어색함 자체가 예전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어색한 채로 모임에 참석하고, 어색한 채로 모임에 머뭅니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어색한 마음이 엄습할 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색한 마음이 나를 사로잡으니, 아! 참 좋다!’
그러면 ‘어색해하는 나’와 ‘어색함을 자각하는 나’ 사이에 공간이 생겨나고, 나는 어색함 속에서 어색함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 p.161
자유는 사랑이 숨 쉬는 공기입니다. 현대인은 배우자에게 흔히 이런 말을 하며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너무 늦게 다니지 마! 화장 너무 진하게 하지 마! 춤추러 다니지 마! 다른 남자(여자) 쳐다보지 마! 등등.
하여튼 ‘마!’ 자로 끝나는 말이 나오려 할 때마다 그는 일단 말을 꿀꺽 삼킵니다. 그리고 ‘정말 이 말을 해야 하는가?’를 세 번 생각해보고 나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맑은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두 사람의 사랑은 성장합니다.
--- p.216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심한 자폐증을 앓았습니다. 자폐증의 정도가 너무 심해 병원에서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하루 종일 접시를 돌렸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 곁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하루 종일 접시를 돌렸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엄마와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아이 곁에 앉아 접시를 돌렸습니다. 아이의 두 누나도 시간이 나는 대로 아이 곁에 앉아 함께 접시를 돌렸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아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아주 많은 날이 지나고 나서, 아이는 아빠를 향해 미소 지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아빠와 엄마 그리고 두 누나가 있는 바깥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마음을 연 것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가 ‘닫혀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빠를 향해 미소를 짓는 순간 가슴 벅찬 감격을 느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아빠와 아들은 깊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마침내 아이는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는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 p.242
『논어』를 배우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자하가 “효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공자가 “낯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자하는 강직하고 의로웠지만 온화함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때로 좋지 않은 낯빛을 보이며 부모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습니다. 저 역시 같은 단점을 갖고 있어서, 눈물이 흘렀던 것입니다.
---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