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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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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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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3년 01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852쪽 | 1218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2734649
ISBN10 898273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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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이끌어갈 아시아인 112인에 대한 짧은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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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라는 용어와 ‘동양’의 관계

사회자 | 바쁜 가운데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에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1945년 이후 정치, 사상, 문학,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던 아시아의 인물들을 소개하는 기획을 세웠습니다. 이 자리에 기획위원들도 나왔습니다만,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의 선정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먼저 한국인은 원칙적으로 제외했습니다. 그것은 20세기 한국의 사상사 내지 지성사를 살펴볼 별도의 기획을 가지고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대상 인물을 시대별, 지역별, 분야별로 안배했습니다. 시대별로는 1945년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을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서 현재까지, 세 시기로 나누어 적절히 선정했습니다. 지역별로는 크게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로 나누고, 동북아시아의 경우 그 비중을 감안해 중국과 일본을 별도로 크게 다루었습니다. 분야별로는 정치, 사상, 문학, 사회, 학술로 나누어 인물을 선정했습니다. 이런 기준을 통해 백여 명이 넘는 인물을 선정했습니다만, 역량과 여건 때문에 중요하지만 다루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서구에 비해 아시아를 잘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소한 인물들이 적지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들을 선정한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해 해당 지역의 전문가를 모시고 좌담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먼저 구체적인 분야로 들어가기에 앞서 아시아의 지리적` 공간적 구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이집트는 어떻게 볼 것인지, 이른바 ‘중동’이란 용어와 관련해서도 그 의미를 간단하게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관계도 다소 미묘하지 않은가 합니다. 끝으로 문화적`역사적 특성을 감안할 때 ‘아시아’라는 용어와 ‘동양’의 관계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이희수 | ‘중동(Middle East)’은 19세기 말 영국이 세계 전략을 위해 만든 정치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영국을 중심에 두고 동쪽을 오리엔트, 가까운 동쪽을 근동, 멀리 있는 한국과 동북아를 극동이라 불렀고 그 중간 지점에 있는 이슬람 문화권을 중동이라 칭한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팽창주의 시대의 용어를 현재 무분별하게 쓰고 있는 거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역사학계, 정치학계, 지리학계가 각각 다르게 쓰고 있습니다만, 중동이 아니라 서아시아라고 쓰는 게 타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아시아란 개념에서 문제시되는 국가가 이집트와 터키입니다. 이집트는 대부분의 영토가 아프리카에 속해 있고 터키는 대부분의 영토가 아시아에 속해 있는데, 지리적 개념보다는 문화`?지리적인 개념으로 볼 때 역사적 상호 교류나 문화적인 영향 면에서 두 나라를 아시아에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집트를 뺀 서아시아는 알맹이가 없을 정도 거든요.

신윤환 | 동남아가 아시아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동남아를 동아시아의 일부냐 아니냐 하는 것은 입장의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학자들 중 상당수가 동아시아를 중국, 일본,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로만 한정하곤 합니다. 동남아를 전공하는 저에게도 동남아는 동아시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강변이 들리곤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 서양 학자들과 동남아 학자들은 동아시아가 동북아와 동남아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기도 하지요.

윤상인 | 아시아를 주체 개념으로 설정한 이 책의 기획 의도를 감안할 때, 서아시아라고 써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아시아라는 단어에는 지리적`?정치적 개념이 강하고 문화적 개념은 상당히 약한 것 같습니다. 문화적`?역사적 근친성을 나타내는 말로서는 ‘동양’이 일반적이지요. 일본어에서 동양이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한국을 포함한 지역, 그리고 불교와 유교, 한자 문명 등 문화적으로 연관된 지역을 말하는 것이지요. 도쿄 대학교 부설 연구소의 명칭은 ‘동양 문화’ 연구소이고, 통산성 산하의 연구소는 ‘아시아 경제’ 연구소인 데에서 그 단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아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가장 먼저 한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은 1903년 런던에서 출판한 『동양의 이상(The Ideals of the East)』에 “아시아는 하나다.”라고 썼어요. 유럽과 대치 개념으로 사용한 이 말은 태평양 전쟁 당시 대동아 공영권 이데올로기에 동원되는 등, 근대사를 통해 대부분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많은 일본인들이 자신을 아시아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리상으로는 아시아에 포함되지만, 인식의 층위에서는 서방 선진국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아니면 적어도 서양과 동양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양(中洋)’ 정도로 생각합니다. 결국 근대화의 우등생인 만큼 아시아적 정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일본을 아시아 속에 편입시킨 이 기획은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조금은 ‘불손’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임상범 | 중국에서도 아시아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이래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1950년대 중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활약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모임에서, 그리고 1970년대 덩샤오핑(鄧小平)이 제3세계의 일원이라고 주장한 것에서 보듯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중국 자신이 아시아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가는 의심스럽네요.
--- pp. 13 ~ 15
“저는 충심으로 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주석의 건강과 장수가 당과 인민의 최대 행복입니다. 저는 주석의 지시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며, 저의 건강 상태로 보아 몇 년 동안 더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1971) “화궈펑(華國鋒) 주석의 영명하고 과감한 지도를 절찬하며, 주석을 확실히 옹호할 것이며, 자신의 과오를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반성합니다.”(1977) 문화 대혁명 때 주자파(走資波)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한 덩샤오핑이 1974년 4월 시아누크 부부를 위한 만찬회에 다시 등장하자, 어떤 외국 언론은 그를 오뚝이라고 불렀다. 그는 실각할 때마다 최고 권력자에게 충성의 편지를 보내고 부활했다. 그는 오로지 권력만을 추구한 추한 인간일까?

“나는 키가 작으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키 큰 동지들이 지탱해 줍니다.” 150센티미터의 그는 동그란 머리에 턱이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덩샤오핑이 아주 엄격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부하들도 모두 그를 ‘무섭다’라고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그런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사람들이 당신을 두려워하오. 외유내강하시오.” 1989년 6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운동이 통제 불능의 상태로 발전하자 덩샤오핑은 무력 진압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사망자 319명, 부상자 약 9,000명에 이르는 ‘천안문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잔인한 독재자였는가?

『자치통감』을 즐겨 읽고 사전 뒤지는 것을 좋아하며 커피와 코코아, 포도주와 치즈를 사랑한 그는 크루아상을 그리워했고, 축구 경기 관람과 브리지 게임을 사랑하고, 「람보」 같은 아주 미국적인 영화도 좋아했다. 동시에 경극 마니아였으며, 요리 만들기를 즐겼다. 그런 취향을 갖고 있던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四川) 성 광안(廣安)에서 소지주이자 비밀 단체인 거라오후이(哥老會)의 셋째 두목 덩원밍(鄧文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명 개화에 관심을 보였던 부친의 권고로 열일곱 살에 프랑스 유학을 떠났지만, 학비 부족으로 노동자로 일하다 혁명 사상에 눈떠 1923년 공산당원이 되었다. 1926년 초에는 모스크바 중산 대학에서 공산주의 학습의 기회를 얻지만, 곧 귀국해서 기록과 일상 업무를 담당했다. 1931년 8월에 장시(江西) 소비에트로 들어간 뒤 마오쩌둥을 지지해서 왕밍(王明)에게 혹독하게 비판받지만, 그로 인해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자신의 충실한 부하로 평가했다. 다른 고참 공산당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대장정에 동참했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그저 걸어갔을 뿐’이었다.

덩샤오핑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 류보청(劉伯承)과 함께 129사단의 정치 위원이 되어 타이항 산(太行山)을 중심으로 한 진지루위(晋冀魯豫, 산시(山西) 성, 허페이(河北) 성, 산둥(山東) 성, 허난(河南) 성의 경계 지역을 말함)에 항일 근거지를 건설한 뒤부터였다. 1947년에는 제2집단군을 조직해서 어위환(鄂豫喫) 해방구를 건설했고, 다음 해 말 화이하이(淮海) 전투에서 80만 명의 국민당 군을 격퇴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에 큰 공을 세웠다. 1950년대는 그가 전국적인 인물로 성장한 시기였다. 서남 지역을 담당하는 중공 서남국의 제1서기로 활동한 그는 1952년 처음으로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부총리가 되었고, 1956년 드디어 정치국 상무 위원회 위원 겸 총서기에 피선되어 최고 지도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을 때, 덩샤오핑은 위대한 스승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침묵했다. 1962년 마오쩌둥이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둘러싸고 자아비판을 행하자, 그는 경제 개혁을 호소한 류사오치(劉少奇)와 함께 국정을 총괄한다. 두 사람은 평균주의를 강조하던 마오쩌둥과 달리 자류지(개인 텃밭), 자유 시장, 손익의 자기 부담과 농가의 생산 청부제를 실시했다. 이때 덩샤오핑은 “흰 고양이든지 검은 고양이든지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하지만 계급 투쟁을 중시했던 마오쩌둥은 이 둘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다.

1966년 5월 시작된 문화 대혁명에서 덩샤오핑은 비판을 받지만,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에게 문제가 생기면 대신 그를 기용하기 위해 당에서 축출하지 않고 연금시켰다. 1969년 중소 분쟁이 발생하자 그는 전쟁 대비책으로 장시 성(江西省)에 파견되어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체력을 키웠다. 린뱌오가 축출되자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에서 결정된 사항을 영원히 뒤집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암에 걸린 저우언라이(朱恩來) 대신 1973년 3월 국무원 부총리에 복귀했다. 그는 1974년 유엔에 출석해 중국을 사회주의 발전 도상에 있는 대국이면서 제3세계의 일원이라고 규정했다. 그 다음 해에는 당 조직, 산업, 군, 교육 분야의 전면 정돈을 추진하며 문화 대혁명파 간부들을 공격했고, ‘이론 문제에 관한 마오쩌둥 지시의 준수’, ‘안정과 단결 확보’, ‘국민 경제의 향상’라는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하면서 계급 투쟁을 무시했다. 사인방은 덩샤오핑과 처절한 권력 투쟁 끝에 그해 11월 그를 직무에서 축출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사인방과 타협할 것을 종용했지만 덩샤오핑은 “저는 원칙 문제에는 결코 타협하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많은 공산당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결국 마오쩌둥 사후 최고 지도자로 올라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마자 예젠잉(葉劍英)을 비롯한 군 장로 그룹은 화궈펑 등 문화 대혁명 온건파, 마오쩌둥의 경호를 담당했던 왕둥싱(汪東興)과 손을 잡고 사인방을 체포했다. 당 주석 겸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에 취임한 화궈펑은 사회 각계에서 부각된 덩샤오핑의 대망론을 막을 수 없었고, 덩샤오핑은 다음 해 7월 당 서열 3위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 후 둘은 ‘4개 현대화 건설’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놓고 대립했다. 화꿔펑은 마오쩌둥의 과거 결정을 모두 그대로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덩샤오핑은 후야오방(胡耀邦)을 내세워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를 발표시켜 ‘실사구시’를 강조했다. 중국 공산당 제11차 전국 대회에서 화궈펑이 무려 네 시간 동안 연설하자 덩샤오핑은 “중국에 필요한 것은 쓸데없는 장광설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이다.”라고 간단히 밝히고 내려왔다는 일화는 두 사람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1978년 12월에 개최된 11기 제3회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는 사상 해방, 민주 선양, 근대화로의 이행을 강력히 호소함으로써 덩샤오핑 노선의 승리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1980년 8월 중공업 중심 경제 부흥 정책의 문제점과 ‘중국-베트남 전쟁의 실패’를 문제 삼아 화궈펑 대신 자오쯔양(趙紫陽)이 총리직에 취임했고, 후야오방이 당 주석에, 군사 위원회 주석에 덩샤오핑이 취임해서 덩샤오핑 지도 체제를 확립했다.
--- pp.142 ~ 146
실사 영화가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의 독특한 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 1월 5일 도쿄(東京) 도 분쿄(文京) 구 아케보노(曙) 초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군수 공장인 미야자키 비행기에서 공장장으로 근무한 아버지 덕택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전시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때 비행장에서 다양한 비행기를 보면서 자랐던 미야자키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하고, 하늘에 대한 동경심을 키우게 된다.

패전 이후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후쿠지마 데쓰지(福島鐵次)의 그림책 『사막의 마왕』의 열렬한 팬으로 지독한 책벌레였다. 어머님이 권해 주는 동화책을 열심히 읽어 냈던 미야자키는 이때의 기억을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등에서 실감나게 표현한다. 중학교 입학 이후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매주 극장에 갈 정도로 영화에 열중했으며, 1956년에 도립 도요타마(豊多摩)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당시에 그가 주로 그린 그림은 비행기와 군함 등이었다. 만화가보다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게 된 것은 1958년 고교 3학년 때 도에이 동화사(東映動畵社)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白蛇傳)」을 보고, 정지 그림이 아닌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1959년 미술 대학에 진학하려던 꿈은 아버지의 반대로 무산되고, 가쿠슈인(學習院)의 정치 경제 학부에 입학하여 일본 산업론을 전공한다. 대학에서는 자신이 찾던 그룹과 가장 유사한 ‘아동 문학 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인형극 활동을 통해 캐릭터 디자인과 스토리 구성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모임을 통해 미야자키는 좌익 운동에 뛰어들었고, 환경과 여성에 대한 인식론적 기준을 형성하게 되었다.

1963년 대학 졸업 후 자신이 희망했던 애니메이터가 되기 위해 도에이 영화사에 입사하고, 평생의 동료인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를 선배 감독으로 만난다. 「멍멍 주신구라」과 「걸리버의 우주 여행」 등의 작품에서 동화 부문을 맡아 애니메이터 일을 시작한 미야자키는 성실한 작화 능력과 뛰어난 아이디어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한편, 일본 애니메이터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고민하며 사내 노동 운동 현장의 선두에 나서기도 했다.

1965년 다카하타가 감독을 맡게 된 극장용 장편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에 발탁되어 처음으로 장면 설계와 원화 감독 일을 맡은 미야자키는 어려운 고비를 겪어 가면서 작품을 완성해 내지만 정작 흥행에는 실패하여 기획 창작 작품의 어려움을 처음으로 맛본다. 1971년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도에이 동화사를 퇴사하고 A 프로덕션, 즈이요 영상(ズイヨ-映像)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다양한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명작 시리즈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스위스의 알프스를 답사할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1978년 「미래 소년 코난」을 연출하면서 일본 내에서 인기 감독으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1979년 처음으로 극장용 장편 감독 작품인 「뤼팽 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을 연출하면서 감독으로서 능력을 검증받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여 미야자키는 다른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그 후 미야자키는 월간 잡지 《아니메주》에 출판 만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하며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이 작품이 마니아 층의 인정을 받으면서 《아니메주》를 발행하는 출판사인 도쿠마쇼텐(德間書店)의 투자로 그는 직접 감독, 각본, 콘티 등을 담당하여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제작했다.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함에 따라 미야자키는 함께 프로듀싱을 했던 다카하타와 함께 도쿠마의 지원으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창업하고, 본격적인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미래 소년 코난」 2로 불릴 만한 「천공의 성 라퓨타」가 8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잇따른 성공으로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인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1988년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무덤」과 동시 개봉한 「이웃집 토토로」가 일본 초유의 흥행 기록을 경신하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심볼로 정해지면서 안정적인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1989년 「마녀 우편배달부 키키」가 다시 흥행에 성공하면서 스튜디오 지브리는 지속적인 기획 창작을 할 수 있는 대형 제작사로 성장하였다. 1992년 미야자키의 꿈이었던 비행기 조종사 이야기인 「붉은 돼지」가 일본 내 최고의 흥행 기록을 경신하고,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미야자키는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라섰다. 미야자키는 그러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작가주의적 예술혼을 담으면서도 대중적인 흥행성까지 인정받는 감독으로서 뮤직 비디오 「On Your Mark」(1995)를 제작하여 관객들에게 새로운 장르의 이해력을 보여주었다. 1997년 그는 지금까지의 유럽적인 휴머니즘을 개혁이라도 하듯, 일본 전통의 전설을 작품화한 「원령 공주」를 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총 제작비 20억 엔, 총 작화 수 12만 5천 매, 일본 관객 1,400만 명 동원 등의 기록을 남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위의 우려를 일소하며 2001년에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은 다시 일본 전역에서 연인원 3,0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가능성과 세계 시장으로 향하는 돌파구를 열었다는 전략가다운 측면 이외에도,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그의 시나리오 구성에서는 장인다운 철저함과 비범함이 느껴지며 이어지는 작품들로 주제가 지속적으로 계승 변주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롭게 썼을 뿐만 아니라 세계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표현 코드를 만들어 냈다.

특히 스튜디오 지브리를 창립하면서 시작된 대표작들의 담론에서는 공간의 절제된 깊이가 반복적으로 강화되어 가며, 이는 할리우드 식 스펙터클과는 다른 일본 특유의 동양적 스펙터클을 형성시킨다. 그의 동양적 스펙터클의 주된 이미지는 바다 개념을 차용하여 중복 등장하는 심도(depth) 있는 하늘이다. 하늘은 실제 눈으로 보이는 하늘과 영상으로 그려내는 하늘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표현하기 힘든 대상이다. 화면의 양감이 너무 평면적이고 단색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미야자키는 실재적 양감의 한계를 부재적 양감으로 전환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도구가 구름이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하늘 가득 떠 있는 구름은 그 종류와 색채, 떠다니는 속도 등에 따라 깊은 원근감을 만들어 내며, 이러한 깊은 하늘의 표현은 결국 더 광활한 하늘의 무한성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공간의 확대는 일본이 가진 섬나라라는 지형적 한계를 타파하여 인식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시키며, 관객은 2차원에 표현된 영상의 ‘깊이’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고 만다.
--- pp. 323 ~ 327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게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서방 세계는 그를 ‘벼랑 끝 외교의 달인’, ‘치고 빠지기의 대가’, ‘국제 깡패’, ‘테러리스트’, ‘악의 축’, ‘과대망상증 환자’ 등으로 비난하고 있는 반면, 아랍 세계는 ‘이라크의 살라딘’(십자군 전쟁의 영웅, 티그리트 출신) ‘미국에 대항하는 아랍의 영웅’, ‘아랍인의 긍지를 살린 혁명가’, ‘아랍 자존심의 대변인’으로 미화하고 있다. 사담 후세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국제 정치, 특히 중동 정치에서 그가 행하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입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001년 9월 11일 사태 이후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 알 카에다의 소탕 그리고 탈레반 정권의 붕괴를 위해 아프가니스탄 공습 등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이라크 전쟁 계획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했으며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 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을 일방적으로 추진했으나 국제 사회의 비난에 직면했으며, 결국 2002년 11월 8일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던 러시아, 프랑스, 중국을 설득한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 이라크 수정안을 상정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킨 후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무기와 화학 무기 등 대량 파괴 무기를 제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이라크를 가장 위험한 국가로 간주하며 유엔 무기 사찰단을 통해 이라크 무기 사찰과 무장 해제를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하고 정권을 교체하려 한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 입장은, 테러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라크와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에 미국인의 63퍼센트 이상 찬성한 것과 미국 의회의 절대적 지지에 근거하고 있다. 미국은 원래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를 연결 고리로 묶어 이라크를 공격하려 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과 무기 사찰단 허용 문제를 제기하며 단독 군사 행동을 감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이 거세어지자 유엔을 통한 명분 쌓기로 방향을 선회했다.

사담 후세인은 2002년 11월 15일 7년 임기의 이라크 대통령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100퍼센트 찬성이라는 경이적인 카드로 부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다시 조건 없는 유엔 무기 사찰단 입국 허용으로 미국의 의표를 찔렀다. 후세인은 개표 직후 행한 연설에서 “이라크 문제는 더 이상 이라크 국민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고 아랍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제부터는 선과 악의 투쟁이다.”라며 1991년 걸프전 개전 전야에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을 되풀이했다.

이라크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자,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간 이란과의 전쟁을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의 확산을 차단하고 미국 등 서방 세계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 그리고 1990년 쿠웨이트 무력 침공으로 미국과 영국 등 다국적군의 무차별 공격을 받았고 유엔의 경제 제재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이라크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담 후세인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 북부 티그리트 지방의 가난한 소작농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 당시 이 지역은 이라크 전체 인구의 65퍼센트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니파였던 사담의 가족과 친척들은 정치적`?경제적인 설움 속에서 생활했다.사담이라는 이름은 숙부인 하산 알마지드가 지어 준 이름으로 ‘충돌하는 자’, ‘대항하는 자’, ‘맞붙어 싸우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마도 그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고려하여 지은 이름인 듯하지만, 미국과 대항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이미 이름 속에 미래의 운명이 예견되어 있었던 듯하다.

사담의 어머니 사브아는 어린 자식을 양육하기 위해 사촌오빠 이브라힘 하산과 재혼했다. 하지만 사담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농촌의 가난과 계부의 괴팍한 성격 그리고 쿠웨이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라크 군부의 무력시위는 어린 사담 후세인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쿠웨이트 합병을 주창했던 가지 왕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고 어린 파이살 2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쿠웨이트 합병 문제는 잠잠해졌지만, 대신 친 영국 성향의 정권이 들어섰다. 1930년대 후반 이라크에는 범 아랍민족주의 이념이 유입되었으며, 터키의 분할 정책으로 차별을 받아 온 북부 출신 소장파 장교들은 이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36년과 1939년 사이에 발생한 영국의 팔레스타인 시위 강제 진압으로 군부의 정서는 친영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자유장교단’ 결성으로 수렴되었다.

어린 사담은 당시 바그다드에 살았던 외삼촌 아드난 카이르 알라의 영향으로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부친 이브라힘은 욕설과 구타로 사담의 공부 의지를 꺾었으며, 어린 그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는 아홉 살의 나이에 오로지 공부를 위해 바그다드에 있는 외삼촌 카이르 알라의 집을 찾았다. 이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으며 바그다드에서는 영국을 지원하는 세력과 독일을 지원하는 세력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반 영국과 반 유대인 정책을 펴며 독일을 지지했던 이라크 라시드 정권은 영국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배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사담의 외삼촌은 이라크 군 장교였으나 친 나치 정책을 취했던 라시드 정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5년간 투옥되었다. 그는 후에 어린 사담에게 아랍민족주의 이념과 외세 배격 사상을 전해 주었다.

사담은 외삼촌의 도움으로 바그다드에서 중학교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는 청소년 시절 외삼촌의 군복 입은 모습에 매료되어 군인이 되고자 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바그다드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 불량으로 퇴교당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가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는 증거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1948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제1차 중동전쟁으로 이라크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라크의 경제를 주도했던 유대인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이라크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사담의 외삼촌은 철저하게 반이스라엘`?반유대인 이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영향으로 고등학교 시절 사담은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 이념에 깊이 빠져들었다.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이라크의 반체제 인사들은 친 영국 이라크 정권인 국왕 파이살 2세를 제거하기 위한 대규모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사담 후세인도 이 봉기에 가담하여 암살 행동 대원으로 활동했다. 이는 사담의 첫 번째 정치 투쟁 경험이었다. 사담은 1956년 이라크 바스 아랍 사회주의당에 입당했다.
--- pp. 379 ~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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