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701∼761)는 자(字)는 마힐(摩詰)이고, 당나라 하동(河東: 지금의 산서성)의 하급 관료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재다능하였다.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왕유는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이미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여러 동생들과 함께 가난하게 자랐다. 특히 독실한 불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접하게 된 불교 사상은 그의 삶과 문예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왕유는 대략 열다섯 살 때 동생 왕진(王縉)과 함께 고향을 떠나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양경(兩京)을 오가며 사회 진출을 꾀하기 시작하였는데, 출중한 문예 재능에 힘입어 귀족 사회의 호감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개원(開元) 9년(721) 21세에 진사가 되어 궁중의 음악을 관장하는 태악승(太樂丞)에 올랐으나, 같은 해 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사창참군(濟州司倉參軍)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왕유는 제주에서의 임기를 마친 얼마 후 다시 기수(淇水) 일대에서 벼슬하다가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현지에서 은거하였으며, 개원 17년쯤 장안으로 돌아와 한거(閑居)하던 중 31세경에 부인과 사별하고 평생을 홀로 살아가게 된다. 개원 22년에는 낙양 부근 숭산(嵩山)에서 은거하였고, 이듬해 봄 마침내 현상(賢相) 장구령(張九齡)의 천거로 우습유(右拾遺)에 등용되면서 좌천의 실의(失意)와 상처(喪妻)의 고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정치적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개원 24년 겨울 장구령이 시기와 모함 속에 파직당하고 간상(奸相) 이임보(李林甫)가 그 자리에 오르고 말았다.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장구령의 실각은 왕유에게서 일말의 정치적 열정과 이상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뜻하지 않은 소용돌이의 충격으로 의기소침해진 왕유는 이듬해 양주(?州)로 출사(出使)해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의 막부(幕府)에서 판관(判官)을 겸임하게 되는데, 변방의 풍광과 호정(豪情) 앞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실의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개원 26년 장안으로 돌아와 동(同) 28년에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올랐고, 같은 해 겨울에는 영남(嶺南)으로 출사해 남방의 지방관 선발 시험을 주재하였다. 이듬해 장안으로 돌아온 왕유는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다가 다시 그 이듬해, 즉 천보(天寶) 원년(742)에는 좌보궐(左補闕)에 올랐다. 이후 안사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줄곧 장안에서 벼슬살이를 하였지만 이임보와 양국충(楊國忠)이 온갖 전횡을 일삼는 정치 암흑 상황에서 '역관역은'의 삶을 살며 종남산 망천(輞川) 계곡에 별장을 마련해 놓고 틈나는 대로 직접 그곳을 찾아 산수의 정취에 젖으며 한가로이 지내곤 하였다.
천보 1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 왕유는 촉(蜀)으로 피난하는 현종(玄宗)을 따라가지 못하고 반군에게 잡혀 보리사(菩提寺)에 갇히는 등 우여곡절 끝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벼슬을 떠맡게 되는데, 이 실절(失節)로 그는 죽는 날까지 줄곧 치욕과 참회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지덕(至德) 2년(757) 조정에서 양경(兩京)을 탈환한 후 반군에게 억류당해 있으며 그들의 벼슬을 했던 사람을 벌할 때, 왕유는 숙종(肅宗)이 그의 내심의 충정을 인정해 특사를 내림으로써 화를 면하였다. 이후 그의 여생은 오직 자책과 보은의 나날이었으며, 상서우승(尙書右丞) 벼슬자리에서 세상을 떠나니 후세에 그를 '왕우승(王右丞)'이라 부르게 되었다.
박삼수(朴三洙)는 경북 예천 태생으로 경북대학교, 중국 대만(臺灣)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각각 중문학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찍이 미국 메릴랜드대학 동아시아언어학과 방문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울산대학교 중문학과 교수로 있으며 출판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는 『시불 왕유의 시』(세계사), 『사기(史記)』(공역, 까치), 『맹자의 왕도주의』, 『당시의 거장 왕유의 시세계』(이상 울산대학 출판부),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공저, 휴머니스트), 『주역―자연법칙에서 인생철학까지』, 『왕유시전집』(이상 현암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