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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숨비소리

: 홍명진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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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445g | 140*210*30mm
ISBN13 9788990492708
ISBN10 89904927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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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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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경을 치고 들어올 듯 어린 고기 떼들이 내 머리 위를 휙휙 지나갔다. 물안경 없이 맨 눈으로 재미 삼아 미역 오리며 바위에 간당간당 붙어 있는 소라를 주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그래서 어른들은 물질을 시삐(쉽게) 볼 일이 아니라고 했던가. 무슨 일이든 그랬지만 마음먹고 덤벼들어도 ‘일’이라는 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나는 테왁에 몸을 의지해 가쁜 숨을 뿜어내며 한동안 출렁이는 바다에 떠 있었다. 여기저기 퍼져서 자맥질을 치며 작업하는 무리들이 내뿜는 날숨소리가 가파르게 들렸다. 해녀들은 홀로 떨어져 물질을 하지 않았다. 해물에 욕심을 내고 정신이 팔려 혼자 멀리 떨어져 작업을 하다가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물 위로 떠오르며 내뿜는 날숨소리는 내가 살아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고 내가 작업하는 곳을 알리는 신호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작업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맥없이 가쁜 숨소리만 짧게 내뱉을 뿐이었다. 깊은 바다에 들어가 작업을 하는 상군 해녀일수록 그 숨소리는 길고 가늘게 치솟았다. 흡사 풀피리를 불어대는 듯, 폐부 깊은 곳에서 떨려나와 차츰 가늘게 잦아드는 날숨소리는 그만큼 숨을 오래 물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pp.47~48

날이 선 사내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등골에 와 박혔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이름자 석 자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그들은 더듬거리며 내가 불러주는 대로 내 이름자와 시어머니의 이름자를 받아 적고 지장을 찍게 했다. 날인을 받은 사내들은 그날 아무런 해코지 없이 떠났다.
“무슨 일이라게. 나가 멩이 열 개라도 모질라켜.”
사내들이 가고 나자 시어머니가 겁먹은 얼굴을 풀지 못한 채 말했다. 그 일은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이웃 삼동네가 다 당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테니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세상물정 모르는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이쪽저쪽으로 몸을 사리면서 쥐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 pp.99~100

“아이구 엄마요, 병원 갈라꼬 나왔는교?”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뺀 연희엄마가 더디게 걸어오는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더니 버스 앞문까지 쫓아 나와 허둥대는 내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올린다.
“일보레 나감시냐?”
연희엄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숨을 고르며 묻는다. 가슴에서 따갑게 올라오는 피리 소리 같은 날숨이 쉬 가라앉질 않는다.
“버스 타고 나갈 일이 있으만 연희아버지 새북에 갔을 때 이르지 그랬는교. 다리도 올찮은 양반이 어짤라꼬 고집은 피워쌌는지. 이럴 때 자석 부려 먹지 언제 쓸라꼬요.”
내 말에 대답은 잘라먹고 연희엄마는 나를 어린애에게 하듯 나를 나무란다. 자식이라는 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는 세월이 무참하게도 아직도 가슴이 설컹거린다. 쉴 새 없이 깜빡이는 의안은 아예 초점이 없지만, 항시 어긋나 있는 듯 희뜩한 그 눈을 나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평생을 저 눈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하고, 인공 눈물을 넣어 주어야 하고, 반쪽밖엔 보지 못하고 살면서도 누가 뭐래도 연희엄마는 내 움딸 노릇을 했다. --- pp.313~314

이 글을 쓰기 두 해 전, 처음으로 제주 4ㆍ3항쟁 기념식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림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 옆자리 앉은 할머니는 자꾸만 내게 말을 붙였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건 내 어머니, 아버지가 평생을 버리지 못한 말이었고, 숨결이었다. 그 말이 따뜻해서 처음 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낯선 길을 물었다. 제주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일 뿐 내게는 생면부지의 땅이었다. 어머니가 살아서는 다시 딛고 싶지 않다던 그 섬에서 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역사가 날것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단 내 육친만이 아닌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들……. 거친 바람 속에서 웅웅거리는 그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잊고자 한 그들 역시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감추어 버린 덧버선 한 짝을 찾는 마음으로 묻어 두었던 원고를 꺼냈다. 퇴고를 하는 내내 카세트테이프에서 풀려나오던 어머니의 어둡고 칙칙한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다정다감하진 않았지만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생을 사랑했다. 고통스런 시간을 살아내면서도 가슴 깊이 묻어 둔 그리움을 한 톨도 버리지 않은 여인이었다. 아픔 없이는 사랑할 수 없음을 어머니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순간순간 삶을 사로잡았던 격정과 고통이 들끓지 않았다면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했으리라.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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