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는 용어의 뜻 그대로 은밀히 시행되기는 했지만, 보호무역주의에 반하는 자유무역주의자들의 노골적 반역 행위로서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밀수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초국가적인 교역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분석돼왔고, 보호무역주의자들은 19세기 전반 내내 이뤄진 자유무역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밀수는 통치권을 약 화시키는 행위이자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지역 사회를 위협하고 고귀한 애국심을 잠재우는 행위”라고 규탄했다. 이들에 따르면 밀수는 관세 수입을 격감시키며 비도덕적인 행위다. 천성적으로 반골 기질에 이기적이고 멍청하기까지 한 성격파탄자들의 전유물이다.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킨다면 밀수꾼들은 불충한 인간들이다. 반면 긍정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그들은 모험심에 가득 찬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런데도 당시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그들은 국가는 물 론 지역 사회와 그 어떤 유대관계도 가질 수 없는 반사회적인 파렴치한이며 가족에게조차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 독종들이었다. 실제로 9세기 밀수꾼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보다 커다란 권력을 위해 합심해서 행동할 능력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때의 밀수꾼들은 기부자들이 아니라 약탈자들이었고, 무책임하고 난잡했으며, 오직 사리사욕에만 관심 있는 인간들이었다.
--- pp.21-22 「들어가며: 낭만, 반역, 권력」 중에서
밀수나 해적 활동을 그린 여러 흥미로운 소설이나 영화는 역사를 단순화해서 보기 때문에 꽤 낭만적이긴 하지만, 지정학적으로는 잘못된 환상을 만들어내서 실제 역사가 갖고 있는 명백한 불균형성과 복잡성을 놓치게 한다. 보다 넓은 시각에서 보면 이런 불균형은 네덜란드의 밀수꾼들과 팽창주의자들이 좋은 사례다. 네덜란드인들은 아메리카에서는 잉글랜드, 프랑스, 포르투갈과 어울려 밀수의 무대를 균등하게 나눠가졌지만, 동양에서는 무자비한 독점자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나 존 호킨스의 낭만적인 밀수와 해적 활동도, 심지어 자신들의 제독인 피트 헨(Piet Heyn)마저 동방에 새롭게 성립한 네덜란드의 제국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곳에는 요새화된 스페인의 항구를 벗어나 카리브 해처럼 느슨한 밀수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던 대신 철저히 계산된 독점 체제가 들어섰다. 네덜란드인들은 한쪽 바다에서는 자유방임적인 약탈자들이었지만 다른 쪽 바다 에서는 편협한 독점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카리브 해 그리고 향신료 제도가 위치하고 있는 반다 해 양쪽의 주민들은 16세기가 저물면서 밀수의 바다에 떠오르고 있던 새로운 오렌지색 태양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카리브 해 사람들에게는 안도를 의미했겠지만, 반다 해 주민들에게는 안 그래도 나빴던 상황이 더 나빠지리라는 것을 뜻했다.
이제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했다.
--- pp.65-66 「제1장: 위대한 야망」 중에서
콜롬비아 언론이 ‘말보로맨(Malboro Man)’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사무엘 산탄데르 로페시에라(Samuel Santander Lopesierra)는 과히라에서 밀수 담배를 엄청나게 들여왔다. 듣기로 그 담배는 말보로 담배를 생산하는 필립모리스(Philip Morris)나 브리티시아메 리칸토바코(British American Tobacco, BAT)가 헐값에 덤핑한 물량 중 일부를 네덜란드령 안틸리스의 밀수꾼으로부터 면세로 사들였다고 한다 (필립모리스나 BAT는 자신들이 공급한 담배가 남미로 밀수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로페시에라의 얼굴은 콜롬비아 잡지 〈캄비오(Cambio)〉의 2003년 5월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렸다. 이 사진은 그가 검거돼 미국에 인도되면서 마약 단속국(Drug Enforcement Agency, DEA)의 비행기에 탑승할 때 찍힌 모습으로, 빨강-하양 줄무늬 운동복에 야구 모자 차림이었고 두 군 데 모두 ‘말보로’ 상표가 새겨져 있었다.
로페시에라는 당당히 투표로 선출된 콜롬비아 의회의 상원의원이었다. 그러나 해당 호 기사에 따르면 그에게는 훨씬 더 어두면 일면이 있었다. 그는 1994년 에르네스토 삼페르 피사노(Ernesto Samper Pizano)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선거 운동 기간에 마약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정치자금을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아루바를 근거지로 하는 만수르(Manzur) 족은 러페시에라가 과히라와 퀴라소에 넘기는 밀수 담배의 공급책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사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통해 55만 달러를 제공했다. 더욱이 그는 피사노의 정적인 변호사 알바로 고 메스 우르타도(햘varo Gomez Hurtado)를 암살한 혐의도 받았는데, 이는 뇌물 행위를 감추기 위해 자행한 범죄였다.
--- pp.123-124 「제4장: 밀수의 사막」 중에서
밀수는 대개 혁명의 땅으로 향하는 직선주로를 달렸지만 검열이 심한 지역에서는 우회로를 활용했다. 시칠리아(Sicilia) 왕국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계몽에 대한 열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작가 쥬제페 토마지 디 람페두자(Giuseppe Tomasi di Lampedusa)는 이와 관련해 자신의 책 《표범(The Leopard)》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세관을 통해 시행되던 검열 제도 덕분에 그 누구도 디킨스나 엘리엇, 플로베르, 심지어 뒤마의 작품도 알지 못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19세기 후반 리투아니아(Lithuania)에서도 벌어졌다. 1864년부터 1904년 사이에 책 밀수꾼들이 모든 서적은 키릴문자로 인쇄해야 한다는 러시아의 정책에 반발해 소(小)리투아니아(동프러시아) 에서 로마문자로 인쇄된 문학 작품이나 잡지, 신문 등을 밀수해 리투아니아로 들여왔다. 이렇게 낭만적 자유주의 신문 〈새벽(Auszrai)〉과 월간지 〈종(Varpas)〉이 밀수를 통해 국경을 넘어왔다.
리투아니아인들의 땅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몇 십 년이 지나서는 반대 방향으로 운송되기도 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의 《닥터 지바고(Dr. Zhivago)》는 요즘 눈으로 보면 그리 선동적인 작품이 아니지만 1950년대에는 소비에트 연방 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인식됐다. 1956년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이 그 원고를 밀수해 러시아 밖으로 빼돌렸다. 역사에서 지워져버렸을 수도 있었던 글과 사상이 마침내 1957년에 출간됐다(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와 러시아어로 출간됐다). 이 작품은 195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1965년 명작 영화로 재탄생했다.
--- p.165-166 「제6장: 혁명과 저항」 중에서
1891년 11월 10일,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채 쇠약하고 수척하고 고뇌에 가득 차 있던 한 남자가 마르세이유(Marseille)의 작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병원 사무원은 기록에 간결한 설명을 추가하면서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무역업자. 이송 도중에.”
병원 사무원에게는 신원불명자 한 사람이 죽은 것이었지만, 그는 시문학 분야에서 눈부신 경력을 쌓다가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이 쏜 총에 맞은 뒤 아프리카로 떠났던 아르튀르 랭보였다. 문학 연구가들에게는 그가 마르세이유에서 죽기 전 20년의 세월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그가 이렇게 서글픈 종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랭보는 그가 아프리카로 떠나고 없는 동안 달아오르던 문학적 평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 다. 아마도 그에게 누구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면 시인이 아니라 무역업자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은 아니었지만 그의 무역은 점차 밀수가 돼갔다. 그리고 그는 애초에 밀수업자가 되기로 한 듯 보인다. 아프리카로 떠나오면서 집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밀무역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 pp.239-240 「제9장: 밀수로 채워지는 세계」 중에서
불법으로 복제된 상품들은 오리지널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미묘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역사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16세기 이후 줄곧 유럽에서 가장 책을 많이 팔던 사람들은 행상들이었다. 이들이 기존 서점에 대해 심각한 위협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로버트 뉴워스가 《국가들의 잠행(Stealth of Nations)》에서 지적했듯이 실제로는 합법적 경로 와 불법적 경로가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공식적인 창작 작품에 대한 비공식적인 반응과 그 반대 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여러 개의 변종을 예로 들고 있다. 소위 길거리 판에서는 전혀 다른 결말을 맺기도 하는데, 《리어 왕(King Lear)》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가 하면 《맥베스(Macbeth)》는 뮤지컬로 바뀌기도 했다.
이렇게 웃기는 왜곡된 버전들은 당시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더욱이 이 해적판들이 새로운 ‘정식판’이 되기도 하고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인 제2의 정식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바로크 시대 독일의 작가 한스 그리멜스하우젠(Hans Grimmelshausen)의 소설 《짐플리치무스의 모험(Der abendeuerliche Simplicissimus)》의 해적판이 나왔는데, 이것이 원작보다 훨씬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자 정식 제3판으로 인정받게 됐으며 심지어 작가까지 이를 승인했다. 비공식적인 시장이 언제나 창의성이 결여되고 품격을 떨어뜨렸던 것만은 아니었으며, 이 사례에서 보듯이 ‘존재의 타당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대의 값싼 상품의 공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런 제품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어째서 이런 것들은 쉽게 구해지고 가격 또한 저렴할까? 어떤 공급선이 이런 효율성을 제공하고 있을까?
--- pp.368-369 「제15장: 암시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