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써 그 남자와는 끝이었다. 다시 말해 내 인생과도 안녕인 셈이었고 적어도 내가 꿈꿔왔던 인생과는 작별이었다. 우리는 심지어 결혼 날짜까지 잡았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죽음이 아니라, 난데없이 나타난 남정네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나에게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솔로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어리지 않은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 p.34
이제 저녁이 되었는데 뭘 하나? 나는 뭘 할지 잠깐 생각해봤다.
- 레페르반으로 가서 족히 두 시간 동안 주차할 곳을 찾아 돌고 돌아 겨우 차를 주차시킨 다음, 악몽과 다를 바 없는 베른트의 기숙사식 아파트에 들러, 손잡이가 깨졌으나 그나마 봐줄 만큼 깨끗한 컵에 따른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서, 내가 독불장군이며 남자들을 잘못 고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앉아 있기(베른트는 왜 여태 내 친구인 걸까?) --- p.72
나는 얆게 썰어낸 양배추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포크로 들어 올렸다. 여기 붙어 있는 크림소스를 보아하니, 최소한 20킬로칼로리는 되어 보였다. 소스가 서서히 양배추에서 떨어져 내리도록, 포크를 접시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제 19킬로칼로리. 베른트를 힐끗 쳐다보니, 그의 걱정스러운 눈과 맞추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그가 나를 알게 된지 정말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15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라.
18킬로칼로리. 그리고 내 몸무게가 70킬로그램이 아닌 50킬로그램이었을 때 알게 되었더라면. 할리우드 다이어트, 파인애플 다이어트, 브리기테 다이어트를 거쳐 단식을 하고 급기야 거식증까지 걸린 내 전적들을 몰랐더라면.
17킬로칼로리. 언젠가 나를 붙들고 제발 건강을 해치지 말라고 부탁한 사람이 그가 아니었기를, 그러던 어느 날 약속했던 미니 골프장이 아니라 의사에게로, 그 다음번엔 심리치료사에게로 끌고 갔던 사람이 그가 아니었더라면, 하고 바랐다. --- p.192
모두들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서,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한 친구들이 나를 이리저리 밀치는 것도 못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아이 윌 서바이브’는 목구멍에서 차마 터져 나오지 못했다. 내 시선은 많은 테이블을 지나고 사람들의 머리를 넘어, 구석에 있는 한 자리에 꽂혔다. 그곳에서는 반쯤 비운 맥주병을 앞에 두고 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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