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아무리 금은보화가 가득이요, 기화요초 만발하여 눈을 미혹해도 마음으로는 언제나 황량한 겨울이던 황궁. 이곳에서 맞는 일곱 번째의 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월영루도, 월영지도, 그리고 나도.”
처음 황궁에서 보았던 그 봄과 똑같은 날이었다. 아리는 그때처럼 몸을 기울여 날리는 꽃잎 한 장을 잡아보려 했다. 꽃과 나비, 그리고 새. 색색의 섬세한 자수가 놓인 심의(深衣)의 넓은 소매가 가는 그녀의 팔을 타고 흘러내리다 바람에 날렸다. 너비가 넓은 붉은 요대의 끝도 함께 날렸다.
소소소!
또다시 한바탕 바람이 불어 쏟아지는 연한 빛 꽃잎들이 그녀의 하얀 옷자락과 하얀 얼굴에 하나씩 앉았다. 검은 머리와 함께 올려묶어 늘어뜨린 붉은 천 위에도 어김없이 흰 꽃잎들은 하나씩 날렸다.
“하아……. 그리운 분께선 어디쯤 오셨을까?”
결국 참지 못한 마음을 토해냈을 때였다. 꽃봉오리 가득 매단 매화 가지 앞으로 팔을 뻗었던 그녀는 중심을 잃고 난간 너머로 휘청거렸다. 그 순간 짙어진 매화향. 아리의 심장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멈췄다. 숨을 쉴 수 없어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윤!
심장이 월영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올라온 것 같았다. 매화향이 짙어진 이유. 그리고 그녀의 작고 가는 몸을 와락 끌어안은 이. 목덜미에 숨결을 묻은 단단한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귓가에 쏟아진 거칠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숨결, 그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의 울림. 그 모든 것의 주인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질끈 감았다 뜬 눈에 울컥 물기가 서렸다. 차마 돌리지 못한 시선에 들어온 것은 강인한 팔. 그 위에 떨리는 손끝을 얹었다. 그곳으로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또 떨어질 뻔했다.”
귓가에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 낮고 강인하나 다정한 목소리. 묶였던 아리의 심장이 단숨에 터진 듯 뛰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린 그날도 이렇게 꽃잎을 잡으려 했었지. 기우뚱 지당으로 쓰러지던 몸을 잡아챈 것은 이 단단한 팔.
홱, 강한 힘으로 돌려세운 아리의 얼굴을 그가 한 손으로 감싸 올렸다. 검은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한 순간, 또다시 숨을 멈췄다. 채 열지 못한 꽃잎 같은 입술이 바르르 떨었다. 그가 맞다. 이마, 눈, 코, 입……. 모든 곳을 확인하듯 시선으로 더듬었다. 깊고 서늘한 윤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하얗게 굳은 그녀의 모습.
꿈이라 생각하려던 순간 흡! 숨결이 막혔다. 얼어버려 닫혔던 아리의 입술에 윤의 입술이 포개졌다. 뜨겁다. 그리고 서툴 정도로 난폭하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 또한 갈구했으니 개의치 않았다. 입술이 매화꽃이 만개하듯 단숨에 열렸다. 아리의 가는 몸을 부여안고 연분홍 혀를 잡아채 제게로 빨아들인 윤이 미친 듯이 여린 입 안을 탐했다. 샅샅이 치열을 훑고 아리의 타액을 삼켰다. 난간에 기댄 채 점점 더 뒤로 휘는 그녀의 가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윤은 아리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하아.”
이 사내, 언제나 폭풍처럼 몰아친다. 거침없이 밀려든다. 단단한 윤의 팔뚝을 움켜쥔 아리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격정에 찬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 윤은 그녀의 머리를 제 가슴에 와락 끌어안았다. 들썩이는 가슴이, 세찬 심장 소리가 그의 흥분을 고스란히 전했다.
“네…….”
거칠고 갈라진 음성이 목을 타고 흘렀다. 윤은 차마 한꺼번에 쏟아내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 쏟아지는 아리의 숨결을 느꼈다.
“그리운 분이 누구인가?”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온 길. 기어이 천리를 간다던 명마조차 지쳐 쓰러져 윤은 중간에 역마(驛馬)를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달려온 길이었다. 흐른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이맘때면 아리가 언제나 이곳에 있음을 알고 있는 그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달려와 그녀를 찾았다.
“아윤…….”
새치름히 닫혔던 입술이 달싹거리며 열렸다. 격렬한 입맞춤에 부어오른 그곳을 윤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어루만졌다. 향긋하고 보드랍고 따스한 이의 몸. 이미 사내의 욕심이 번진 눈빛이 서늘함을 밀어냈다. 불처럼 이글거렸다.
그새 또 컸다. 하루가 다르다. 아이에서 소녀가 되고 어느새 어엿한 여인의 태가 난다. 울음도 많고, 웃기도 잘하던 꼬마 아가씨는 이제 부끄러워 얼굴도 못 드는 의젓한 숙녀로 자랐다. 그러니 누르고 눌렀던 마음이 터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윤, 어찌 지금 오셨어요?”
윤의 거친 숨결에 몸을 떨면서도 아리는 그리움을 담아 물었다. 아직 황자의 군대가 회군한 사실이 없는데 이렇게 돌아온 그가 의아했다. 성정 급하신 폐하께서 아시면 불벼락이 내리실 텐데.
하지만 생각과 달리 마음은 가눌 수 없다. 매화향에 섞인 풀 향기. 초원을 말과 함께 내달리는 그에게서는 언제? 짙푸른 그곳의 향기가 났다.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던 윤의 강건한 체취, 여전히 변함없었다.
“보고…… 싶었다.”
붉게 얼굴을 붉힌 아리가 겨우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을 때, 윤도 무거운 입을 열었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뜨거운 혈기를 이제는 억누를 수 없음이다.
“저도요.”
그동안 소식 한 자 없음을, 무정을 지워주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이리 와주셨으니……. 아리의 검은 눈망울에 물기가 서렸다.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 정인의 얼굴 위로 손끝을 올렸다. 가늘게 떨고 있는 그 끝을 윤이 덥석 잡아챘다. 달빛에 비친 눈빛이 반짝였다.
“오늘은…….”
이대로 놓아줄 수 없다. 꽃향 머금은 작고 가는 몸을 제 안에 두었다. 기어이 사내의 욕심이 봇물처럼 터져버렸다.
“황자궁으로 함께 가겠느냐?”
아리의 눈이 천공의 달만큼 커졌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황자궁으로 불러주시길 유모는 매일을 하루같이 노래하지 않았나. 커진 눈만큼 가슴이 달달 떨렸다. 문득 그의 가슴도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리는 가냘픈 한숨을 내뱉었다. 짙게 다가온 윤의 눈빛과 뜨거운 숨결이 떨리는 가슴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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