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라의 눈물이 얼어붙은 비늘 위로 흘러내릴 때, 기달티 또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 온기를 기억한다. 그는 이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덧없다 생각한 세상이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 따스함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살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것 때문에 다시 죽기로 결심했다. 아직 살아 있던, 그래서 따스하던 수많은 생명을 단숨에 꺼트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젠가 결국 같은 일을 반복할 자신을, 심지어 가장 소중한 사람마저 죽이려 했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 스스로와 싸웠다. 검은 힘에 묶인 질긴 생명을 끊기 위해. 그 결과 그는 고통 속에서 아주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 Ⅱ부 프롤로그 「개와 고양이」 중에서
“고통스럽게 낳아서 미워하다 버릴 바엔 차라리 지금 지우는 게 현명할 것 같다만, 갈등이 된다면 좋을 대로 하렴. 다만 선택은 빨리 해야 할 것 같구나.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우린 널 도와주지 않을 거거든. 자, 어떻게 하겠니?”
부드럽게 목을 조른다면 저런 느낌일까? 선택을 강요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친절했다. 그 때문에 소녀의 몸은 더 경직되고 말았다. 선처를 바라듯 요테르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은 친절하면서도 차가웠다. 이윽고 소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눈은 몹시도 위태롭게 떨고 있었다. 그렇게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눈물 몇 방울이 투두둑 바닥에 떨어졌고 이어진 걸음이 그 눈물을 밟았다. 소녀는 내 손을 놓고 연구원들에게로, 창녀들의 무리로 돌아갔다. --- 「소유자들」 중에서
“이런 거야. 이제까지 알던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던 진짜 나를 발견한 느낌. 이렇게 말하면 더 모르려나?”
“어쨌든 지금까지의 자신은 부정당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사람들이 나를 키브사라고 부르는 건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지 않아. 오히려 나를 완성하는 것 같아. 라이시, 혹시 이런 기분 알아? 아, 내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구나, 하는 기분.”
라이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는 안타깝게 웃었다.
“나는 키브사라고 불린 이후로 매 순간이 그래.”
가장 처음은 우즈의 엄마를 만났을 때였다. 그리고 야빈과 동생들을 데려왔을 때, 겁먹은 무아카를 끌어안았을 때, 기달티에게 살아도 좋다고 대답했을 때, 제미라가 무아카를 용서했을 때……. 그 모든 순간순간에 나는 느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 「갈라진 도시」 중에서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몇 번의 승리에 들떠 있었다. 이대로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동안 정말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는 세상을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고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상처 입고 억압받으며 죽어 간다. 악당을 혼내 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그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악당은 없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악당이었다. 자기 아이를 죽여야 하는 여자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아이를 죽이는 편을 택했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해 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또 같은 일을 반복했다. 억압받던 자들은 억압하는 쪽이 된 것을 좋아했다. 나는 눈앞에서 죽어 버린 한 아이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았는데, 이 세상은 지금도 스스럼없이 누군가를 죽인다. 세상을 구하고 싶은데 정작 이 세상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 「무더위」 중에서
“너무 아파…….”
“이 길은 아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는 괴로움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런 내게 나는 다시금 속삭였다.
“하지만 웃어.”
“못 하겠어.”
“할 수 있어,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
그렇게 말하며 나는, 키브사는 다시 내게서 멀어졌다.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바라보는 키브사의 눈이 슬퍼 보였다. 나는 그 눈빛에 담긴 많은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나이기에 나를 가장 사랑했지만, 나이기에 나를 가장 아끼지 않았다. 그 때문에 키브사는 내 눈물을 가릴지언정 닦아 주지는 않는다. 내가 이렇게 울더라도 이 길의 끝을 가리킨다.
“그 끝에서 너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모든 것을 잃어야 할 거야.”
아, 그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 피해 갈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 나는 아직 다 모르는, 하지만 내 안의 나는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는 비밀에 쌓인 이야기. 그것이 바로 아나하라트.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
슬픔에 잠긴 내게 키브사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하얗게 웃는 공주를 보며 나도 마지막으로 눈물을 떨어트렸다. --- 「흑암의 왕」 중에서
나는 한숨을 삼키며 라이시에게 조금 더 기댔다. 시로니의 말처럼 우리의 구명정에는 인원 제한이 있어서 한계를 더듬듯 이 망망대해를 헤매야 하는 걸까?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정말 구원일까? 내가 이루어야 하는 구원은 정말 그토록 편협한 것일까? 나는 여전히 답을 모른다. 다만 이 어그러진 세상이 내게 조만간 답을 요구하리라 생각할 따름이다.
나는 상자 속에서 만났던 리브나 키브사를 떠올렸다. 내 안에서 침묵하는, 내가 아직 다 모르는 나. 때를 기다리는 그와의 만남은 희미한 실마리와도 같았다. 나는 그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으며 라이시에게 다시금 물었다.
“라이시, 아나하라트가 뭔지 알아?”
라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더 묻자 그도 더 대답했다.
“아야라에게 들은 적 있어.”
“무슨 뜻이야?”
“좁은 길.”
좁은 길, 나는 라이시의 대답을 곰곰이 되뇌었다.
--- 「유령 사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