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다. 1959년 7월 30일 대법원 재심 청구가 기각되고 바로 그 다음날인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조봉암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국사회의 비겁한 침묵 속에 자행된 반인권적 정치탄압 용공조작 사법살인”
2011년 1월 20일, 재심에서 무죄 선고가 난 후에 국회방송에서 제작한 조봉암에 대한 영상물에 등장하는 자막이다. 지금도 저 단어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어쩐 일일까? 조봉암 사건 같은 건 50여 년 전에나 가능했지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p.24
-진보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과학적 선거를 도입해서 선거운동을 하고, 민중 속에 들어가 통일운동에 대한 참여를 이끌어내고, 당원들의 수를 늘려가면서 참여도를 높이고, 진보통합으로 정권교체의 큰 그림을 그려냈던 것이 그의 선택과 실천이었다. 그는 낙관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이끌어왔지만 지금 그는 구치소의 독방에 갇혀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너무 성급하게 열매를 따려고 했던 것인가?--- p.48
-낮은 단계부터 차근차근 해 나갔어야 한다. 통합을 단 한 번에 이루려다 보니 통합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대는 높아졌고, 이것이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실망과 반발도 예상보다 커졌다. 당시에는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 p.83
-종북 보다 종미가 문제라는 발언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10년 전이나 20년 전보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평등한 관계로 발전했기 때문에 종미라는 말이 맞지 않다는 뜻이라면 그야말로 근거 없는 허언이다. 이석기는 뿌리 깊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 특히 위정자들이 대한민국의 국익이 아니라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최근 미국의 사드 배치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은 뿌리 깊은 ‘종미’가 현실적인 문제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p.121
-제도권 정치인이 될 준비가 부족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석기는 가까운 지인이나 후배들로부터도 말투와 어휘 선택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자주 받곤 했다고 한다. 이런 언어 감각과 비대중적 정서가 문제의 5.12 강연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강연에서의 발언은 애국가 발언과 마찬가지로 비난하거나 공격할 수는 있을지언정 구속하고 처벌할 사법적 대상은 아니다.--- p.123
-이석기는 당시의 상황을 통합진보당에 대한 계속되는 공세와 탄압으로 인식했다. 지배구조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그의 진단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 공세가 자신에 대한 내란음모죄와 통합진보당 해산으로까지 이어질 것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게다가 최초로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대중적 진보정당 전략으로 손을 잡았던 내부의 적들이었다.--- p.138
-이석기의 신상발언에 이어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석기에 대한 체포동의안에 대한 표결이 시작됐다. 289명의 국회의원이 투표에 참여했다. 개표 결과는 찬성 258표, 반대 14표, 기권 11표, 무효 6표였다. 이석기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p.169
-5월 10일과 12일의 강연회의 개최 배경과 동기, 실제 있었던 발언 내용과 그 취지를 모두 검토해 보아도, 내란 음모·선동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목적과 인식, 행위가 없었음이 명백하다. 나아가 5월 12일 이후에도 내란음모를 준비하거나 실행할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따라서 피고인들에 대한 내란음모·선동의 공소사실은 모두 무죄이다.--- p.250
-이 사건에서 원심판결이 대표적으로 문제 삼는 표현인 ‘미 제국주의’, ‘자주·민주·통일’이라는 말은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언급 중의 하나일 뿐이고 이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맥락의 연구도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말들은 사상의 경쟁 시장에서 충분히 토론 가능한 이야기이며 실지로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미 토론되고 있는 주제이다.--- p.275
-천낙붕 변호사는 이어서 RO의 허구성과 5월 12일 강연 이후 강연자들의 행동을 예로 들면서 원심판결의 부당함에 대해서 설파했다. 강연 참석자들은 절반이 여성이고 권총 한 자루 없는 민간인들이며 그들은 강연 이후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누구도 무장 폭동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p.279
- 네, 국제인권법에서는 이런 사상의 자유나 의견을 가질 권리 같은 경우는 절대적 권리로 보호하는 것이지요. 비상사태를 포함해서 어떤 경우에도 이 부분은 침해되면 안 된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서 이런 사상, 의견 자체를 처벌하는, 국제인권법의 당사자국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위반하는 법이 계속 존속되고 있어서, 이걸로 처벌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 박래군--- p.303~304
-한홍구는 한국 현대사에서 ‘내란 사건’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조작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는지 실례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한국사에서 5·16쿠데타나 광주항쟁 무력진압과 12·12군사반란 같은 불법적인 과정, 일종의 내란을 통해서 정권을 쥔 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고한 시민들, 특히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내란죄로 거는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음을 지적했다. 한홍구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증언했다.--- p.330
-내란음모와 내란선동은 모두 4개의 기둥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4개의 기둥은 첫째 RO라는 지하혁명조직, 둘째 사전 준비회의, 셋째 전쟁이 임박한 시기이거나 혁명의 결정적 시기, 넷째 제안과 수락이라는 합의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네 가지를 모두 부정했다. RO라는 지하혁명조직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 사전 준비 행위가 있다고 볼 수 없다, 혁명의 결정적 시기나 전쟁이 당장 임박한 시기였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결은 내란음모와 내란선동을 떠받치고 있던 4개의 기둥을 다 부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내란 선동을 유지한 이유에 대해 우리는 법리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현 시기에 재판부가 느꼈을 정치적 중압갑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김칠준 변호사:--- p.358
- 최근 몇 년간 제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는 속칭 ‘이석기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이석기 전 의원과 그 동료의 옥사에 대해 여론이 비교적 잠잠하고 무관심한 것은 실로 놀랍고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이석기와 그 동료들이 감옥에 있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적 원칙의 유린이며 기초적 인권의 유린입니다. 그들이 감옥에 있는 이상, 우리는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지칭할 권리도 없습니다. -박노자--- p.382
-나는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운명이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로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중은 해방 이후 한 번도 태양이라는 권력에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 민중이 권력이라는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은 2012년이었다. 야권연대를 통한 공동정부의 수립이 눈앞에 보였을 때 태양은 거침없이 이카로스를 공격했다. 그의 날개는 아직 태양열을 견디기엔 너무 약했다. - 이석기:
--- 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