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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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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0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568쪽 | 698g | 140*205*28mm
ISBN13 9791160481969
ISBN10 116048196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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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간 것을 확인한 크레이안은 방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자,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엘리시온이 보였다. 그 위에 낯익은 겉옷이 덮여 있다. 황제의 것이다.
크레이안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냥 술을 마셨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술은 술대로 마셨고, 일은 일대로 쳤을지 누가 아는가. 엘리시온이 사내라 해서 수비범위 밖에 있는 건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공공연하게 들려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남색이었으니까.
살금살금 걸어 엘리시온이 있는 소파까지 왔다. 크레이안의 손가락이 황제의 옷자락을 잡았다. 걷어 내는 손이 떨렸다. 당장 심장이 터져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쿵쾅쿵쾅 소리가 시끄럽다.
사라락.
옷이 떨어졌다. 드러난 엘리시온은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레이스 끈 하나 풀리지 않은 채였다. 걱정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식었다. 크레이안은 털썩 소파 앞에 주저앉았다.
무심코 손으로 옆을 짚었는데 바스락 소리가 났다. 겉옷 안감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의심도 병이다.
“이 영감탱이가 진짜!”
크레이안이 종이를 와그작 구기다 못해 갈가리 찢었다. 스치듯, 황제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오묘한 단어를 썼던 거나, 상의 자락을 헤치고 왔던 것 등 모두 의도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닌 척 꽁무니를 빼면서 속으로는 즐거워했겠지.
조롱당했다는 분노가 천장을 뚫을 뜻 튀어 올랐다. 그가 악 소리를 내자, 소파에 누워 있던 것이 꿈틀 움직였다. 엘리시온이 눈을 떴다. 졸음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없어. 그러니까 더 자. 자도 돼.”
일어나려는 엘리시온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푹신한 곳에 머리가 닿자 잠이 쏟아지는지 엘리시온이 눈을 천천히 끔뻑인다. 아예 감아 버리라고 눈꺼풀 위에 손을 올리고 쓸어내렸다. 엘리시온은 금방 곯아떨어졌다. 크레이안은 감은 눈을 확인하면서도 쉬이 손을 내리지 못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만져 보면 안 될까.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잠깐 만진다고 문제 될 게 있을까. 게다가 엘리시온은 자고 있지 않은가. 술까지 먹었으니 쉬이 깨어나지도 않을 거다.
스쳐 지나가는 줄 알았던 검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크레이안은 머리를 몇 번 흔들어 상념을 쫓아내다, 결국 굴복당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올려진 손이 엘리시온의 뺨에 닿았다.
여인들의 피부처럼 부드러운 건 아니었다. 거칠거칠했고 생채기도 몇 개 그어져 있었다. 틀림없는 무관의 얼굴이다. 사내의 얼굴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크레이안은 손을 떼지 못했다.
한참 동안 얼굴을 쳐다봤다. 색색 숨소리가 귀여웠다. 잠깐 살짝 벌려진 입술이 섹시하단 생각을 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입술이 맞닿아 있었다.
기겁해 뒤로 물러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꼬리뼈에서 자르르 울려오는 아픔보단, 엘리시온이 깨었을까 걱정이 됐다. 다행히 눈 안 떴다. 안도감에 한숨을 쉬고 나자 자괴감이 찾아왔다. 크레이안은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남색가가 아니란 말이야…….”
사내와 사내가 붙어먹었다더라. 크레이안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예쁘고 고운 여성을 두고 왜 사내놈과 연애질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여자가 없나. 비꼬면서 생각하길, 자신은 절대 남색은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아들을 낳아 줄 여자 한 사람만 바라보며 평생을 바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뭔가 이 꼴은. 사내인 거 뻔히 아는 놈에게 빠져 희희낙락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 한구석이 슬며시 얘기를 했다. 그래도 아직 사랑은 아니잖아. 입 맞춰 본 게 다인 데. 그걸 남색이라고 할 수 있나. 그냥 스킨십이지. 왜, 전사들끼리도 격렬한 전투 뒤 감정이 격양돼 껴안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리고 입맞춤이 뭐 어떤가. 평소에도 머리 정도는 만져 보고 그랬는데.
주절주절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르는 변명들을 늘어놓던 크레이안의 시선이 종잇조각에 닿았다. 이제는 무슨 말이 적혔는지도 모르는 조각들이 한목소리로 압박을 가했다.
-아니긴 뭐가.
비수 같은 한마디가 가슴을 깊게 찔렀다. 크레이안은 다리를 모으고 얼굴을 파묻었다.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하긴 처음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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