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말이지, 그게 한 10년 됐나? 너 같은 애가 있었어. 너랑 증세도 똑같았지. 몇 번이나 죽으려고까지 했던 애였는데, 어휴, 나 정말 고생했다. 녀석 달랜다고. 그랬던 녀석이 지금 꼬박꼬박 스승의 날만 되면 찾아와. 좋은 남자 만나 신나게 잘 산단다. 여자는 시집 잘 가는 게 최고 아니겠냐? 그러니까 미래를 생각하면서 딴 생각 말고, 응?”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은 두 손가락을 자기 눈에 바짝 갖다 대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내가 널 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마라. 난 항상 너를 보고 있어.”
후니 오빠가 날 보고 씩 웃었다. 귀신이 지금 자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걸 알면 담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후니 오빠는 내 남자친구다. 귀신이기도 하고. 남친과 귀신이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세상엔 꼭 어울리는 것만 있진 않으니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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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지나 뒤로 검은 머플러가 살짝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보려고 몸통을 뒤로 쭉 빼서 지나 뒤를 살펴보았더니 검정색 머플러를 두른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지나 뒤에 서서 마치 지나를 제자리에 앉히려는 듯 지나의 어깨를 힘주어 눌렀다. 하지만 지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인상을 쓰며 잔반 처리구로 가서는 그대로 밥을 엎어버렸다. 여자는 망연자실 서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자
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여자는 바람처럼 급식실을 왔다 갔다 했다. 후니 오빠도 방금 저 여자를 봤나 싶어 여자 쪽을 한 번 보라고 눈짓했다. 오빠는 귀신쯤이야 어디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눈만 껌뻑껌뻑했다. 하지만 나는 오빠 이외의 귀신을 처음 본 터라 조금 무서워져 남은 밥을 마저 먹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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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을 할 때 정말 숨이 터질 것처럼 뛰는데 말이지. 옆에서 ‘힘내!’, ‘힘내라고!’ 이렇게 소리 지르면서 통통 튀는 에너자이저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본 적 있니?”
“텔레비전에서 마라톤 경주 몇 번 봤지만 옆의 사람들은 별로 기억이 안나.”
“거기 학원 말이야. 스파르타식으로 굴린다고 엄청 광고하는데, 선생님들이 모두 그랬어. 에너지로 가득 차서는 박수치면서 ‘파이팅!’을 얼마나 외치던지. 그 사람들은 아픈 사람도 없고 힘든 사람도 없는 걸까 싶었어. 내가 지금 힘들고 괴로운 건 ‘성장통’이라는 거야. 그런 아픔이 있어야 성장한다나? 모두 ‘힘들어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뿐이었어. 주위엔 결의에 가득 찬 애들밖에 없고. 하지만 난…… 그게 사는 거 같지 않았어.”
“그럼 뭐 같았는데?”
“검투사들 싸움. 광장에서 사람들이 서로 죽이려고 싸우고, 피 튀기는 걸 보면서 관중들이 더 흥분해선 박수치고 웃고. 어서 죽이라고, 죽여 버리라고 고함치는 그런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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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달리다 못해 질린 나는 지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검은 여자라면 이젠 정말 지긋지긋했으니까. ‘일반인’이 ‘일진’에게 걸어가자 급식실에서 밥을 먹던 아이들 전부가 날 피했다. 지나에게 가는 길이 마치 모세의 바다처럼 쫙 하고 갈라졌다.
내가 다가가자 신나게 짜장에 밥을 비비던 개새가 젓가락을 확 던져 버렸다. 쌍수는 팔짱을 끼더니 흥미로운 동물을 대하듯 요리조리 나를 살펴보았다. 정작 지나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내 얼굴을 지켜보기만 했다.
“왜?”
지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엄…….”
“뭐”
“너, 엄마……가 있어.”
내가 검은 여자를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뭐라고?”
“네…… 바로…… 옆에.”
내가 폭탄을 던진 자리가 식판 긁는 소리, 덜그럭대는 소리, 시끄러운 수다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이게 미쳤나!”
개새가 소리를 지르며 자기 급식판을 확 뒤집어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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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고, 해야만 해.”
“정말 내 말 모르겠냐? 만일, 만일에 말이야. 내가 나를 믿을 수 없고 너무 싫어져서, 미쳐서 돌아버릴 때 있잖아. 그땐 어떻게 하냐고!”
‘나도 그래.’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할 수 없지. 아마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그런 마음이 들 거야. 하지만 그 순간이 되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어. 노력은 어차피 계속해도 상관없잖아?”
--- p.217
저 새는 곧 날아가겠지. 언제나처럼. 만일에 비가 오면 젖은 날개를 접고 잠시 피할 곳을 찾을 테지.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날개를 펴고 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귀를 기울이자 어딘가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움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깊고 깊은 울림 속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