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이와 유사한 정복 정책과 식민 정책을 구사하면서 유럽의 팽창주의에 편승한 결과, 제국과 연장선에 있는 가장 커다란 땅덩어리인 북부 아시아 전체, 즉 시베리아라 불리는 땅을 귀속시키게 되었다. 식민팽창주의에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러시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단지 범선 함대를 구성해 대양을 가로질렀느냐, 아니면 같은 대륙에 있는 강과 산을 넘어 ‘미개척지’로 진출했느냐의 차이뿐이었다. 러시아 탐험대는 동시대 서구 유럽인들이 누렸던 군사조직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화기를 소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덜 발달된’ 원주민들의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만든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 「제1장 시베리아의 ‘발견’」, p.17
1483년과 1499년 더 큰 규모의 탐험대를 파견한 모스크바 공국 사람들은 우랄산맥 너머에 살고 있는 종족들을 복속시켰다. 펠림, 북 소스바, 오브, 이르티시 같은 강들에 걸쳐 있는 땅들은 모두 침략을 받았고 포로가 된 한티족, 만시족, 사모예드족 등의 여러 공동체들은 전략적으로 일시적인 협정을 맺어 공물을 바치는 러시아의 가신국이 되었다. 16세기 초 러시아인들이 북극해에까지 도달함으로써 땅과 강을 통한 북동쪽 통로 이외에도 백해로부터 오브 강 하구에 이르는 바닷길이 또한 열리게 되었다.
--- 「제2장 17세기의 시베리아 침략」, p.44
러시아의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강압적이고도 부정한 방식의 행태들이 생겨난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그들을 먹여 살리는 코르믈레니예라는 급여제도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제국정부에 의해 임명된 지방관들은 월급을 받지 않았지만, 대신 이 제도 때문에 ‘자급자족’을 위해 제국 재무성에 바치는 일정량 이상의 세금과 부과금을 강제 징수했다.
--- 「제2장 17세기의 시베리아 침략」, p.50
1620년에 이르러 서부 시베리아의 합병이 끝나자 모스크바 식민정부는 한껏 고양됐다. 서쪽으로는 우랄산맥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예니세이 강 계곡까지, 북쪽으로는 북극해로부터 남으로는 초원지대와 알타이산맥까지 이르는 영토 전체를 러시아가 다스리게 됐다. 모스크바 영토의 두 배가 넘는 넓이인 324만㎢의 영토가 모스크바에 귀속됐으며, 요새화된 도시들이 하나의 망을 이루어 원주민들에게까지 짜르의 공권력이 미치게 됐다. 따라서 러시아가 침입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던 공물제도를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 「제2장 17세기의 시베리아 침략」, p.54
북부 아시아의 모든 종족 공동체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퉁구스족도 공동체 정신이 강해서 사냥에 실패하는 것은 그 당사자인 사냥꾼의 잘못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잘못으로 여겨졌다. 퉁구스족은 이렇게 공동체가 나누어 갖는 습관을 니마트라고 불렀다. 순록은 공동체 전체의 재산이었고, 숲 속의 여러 지점에 기둥을 박고 세워놓은 창고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등 적대적인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원시사회에서 상호협조의 개념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씨족 공동체는 토지를 그들의 사냥터로 생각했지만 땅 그 자체는 모든 종족과 동물들에게 속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제3장 17세기의 중부 및 북동부 시베리아」, p.66
케트족의 수가 감소한 또 하나의 분명한 원인은 러시아인들이 진출하기 이전에 시베리아에 없었던 전염병들, 특히 천연두의 발생이었다. 1630~1631년에 처음 발생한 천연두는 서부 시베리아의 한티족, 만시족, 사모예드족, 섹쿠프족, 케트족 등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중부 시베리아의 퉁구스족은 그로부터 20년 후에 이 전염병의 피해를 입었으며, 케트족과 셀쿠프족은 1660년대에 다시 악성 전염병의 피해를 입었다.
--- 「제3장 17세기의 중부 및 북동부 시베리아」, p.73
163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러시아인들은 레나 강의 야쿠트족 거주지에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야쿠츠쿠와 같은 위도상으로 시베리아의 2/3가 되는 지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나머지 부분들과 같이 북동쪽 극지대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을 무렵에는 결코 ‘비어 있는’ 땅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오던 땅이었다.
--- 「제3장 17세기의 중부 및 북동부 시베리아」, p.85
극동의 이 새로운 지역에서 러시아 관리들의 익숙한 수법들, 즉 탈취, 약탈, 횡령 등이 곧 나타났으며, 또한 원주민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제3장 17세기의 중부 및 북동부 시베리아」, p.97
부리야트족은 대부분의 시베리아 원주민들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종족으로 17세기에는 적어도 약 3만 명에 달했다. 이들의 사회조직 역시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씨족장들은 세습적인 귀족 신분으로 일반 씨족원들에 대해 상당한 권력을 행사?고, 특히 동부 부리야티야 지역에는 많은 가축을 소유한 계급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지와 목장에 대한 권리는 공동소유였으며 씨족 내에 상호협동체제가 작동되고 있었다(러시아 공산주의 저술가들은 이것을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제4장 17세기의 몽골과 중국의 국경」, p.101
몽골 북부 변경지대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제국과 러시아의 정복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혼란의 와중에 몽골족과 퉁구스족이 커다란 집단을 이루어 러시아 점령 지역을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양상이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계속됐다.
--- 「제4장 17세기의 몽골과 중국의 국경」, p.113
러시아의 식민 이주는 시베리아 전체에 고르게 확산된 것이 아니었다. 대략 예니세이 강과 앙가라 강에 의해 분리되는 서부와 동부 시베리아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러시아인들이 이주해 농업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은 서부 시베리아의 남부 지방이었으며, 이 같은 상황이 계속 지속되었던 데는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다. 예니세이 강 지역 역시 변경지대였는데, 그 동쪽으로는 비교적 우호적인 환경의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곡식재배가 불가능한 영구동토대가 시작되었다.
--- 「제4장 17세기의 몽골과 중국의 국경」, p.115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러시아 농민들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땅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 땅을 사용한 방식 또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러시아 농민들은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원주민의 사냥터인 삼림을 모두 불태우고 동물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 러시아 농민들은 이주하는 모든 곳에서 이런 거친 ‘남벌과 화전 일구기’ 방식을 택했으며, 그 결과는 20세기에도 여전히 원주민들에게 재앙으로 남아 있었다.
--- 「제4장 17세기의 몽골과 중국의 국경」, p.116
시베리아 타타르족 공동체들 중에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 이주자들로 간주되는 두 집단이 있었다. 이들 중 하나가 부하르족이었는데, 상인과 장인들이었던 이들은 주로 튜멘과 타라 지역에 살면서 러시아제국과 중앙아시아 칸국들 사이를 연결하여 무역거래를 하였다. 부하르족은 시베리아 타타르족 중에서 도회풍의 세련됨, 러시아 정부에 대한 충성스러움, 그리고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구사 능력 때문에 두드러져 보였는데, 이들은 상업적 중류계급의 중심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부하라와 기타 이슬람 문화 중심지들과의 문화적 접촉을 유지하는 데도 일조했다.
--- 「제6장 18세기」, p.135
다음해 아바차만 부근의 이텔멘족 ‘반역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캄차카에 파견된 사람은 다름 아닌 최초의 탐험가 아틀라소프였다. 그는 거칠고 규율 없는 코사크 용병 진압부대를 거느릴 최적의 인물이었다. 도적 떼 같은 다른 러시아 극동 탐험대 대장인 하바로프와 마찬가지로 그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독재적이고 또한 잔인했다.” 캄차카에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그는 코사크 용병들의 식량을 유용하고 원주민들과 뒷거래를 하는 등 비양심적인 일들을 공공연히 자행함으로써 부하들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 「제7장 북태평양으로의 영토 확장」, p.149
이런 무절제한 남획은 결국 해달의 급격한 고갈 상태를 야기하여 러시아인들은 더 멀리 있는 섬들로 더 긴 여정의 탐험대를 보내게 됐으며, 결국 1763년 알래스카만의 커다란 섬 코디약에 도달하게 됐다.… 100년간 알래스카에 존재했던 식민지인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교통과 식량 공급상의 커다란 어려움 때문에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부담이 됐으므로, 마침내 1867년 미국에 팔아넘겨졌다.
--- 「제7장 북태평양으로의 영토 확장」, p.165
뻬쩨르부르그 정부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궁핍한 상황에 대해 눈감고 있지만은 않았다. 19세기 전반기에 비러시아 종족들의 궁핍한 상태를 막기 위해 원주민 영역에 러시아인 상인들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법이 도입됐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예 금지법이나 주류 판매 금지법 같은 정부 정책들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비러시아 종족들의 생활방식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파괴돼갔다. 이것은 결국 원주민들의 자급자족 경제기반과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는 것을 의미했다.
--- 「제8장 19세기 러시아제국 치하의 시베리아」, pp.171-172
러시아의 정복으로 시베리아의 종족 지도는 급격히 변했다. 러시아는 처음에 강을 따라 나아가다가, 간선도로인 트락트를 건설하게 됨에 따라 타이가의 남쪽 경계를 지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고 들어갔으며, 결국 철도를 부설하게 되었다. 간선도로의 북쪽에 살던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러시아 침입자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착취당하자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지키려고 오로지 한 방향, 즉 한적한 북쪽으로 탈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 「제8장 19세기 러시아제국 치하의 시베꺸아」, p.185
19세기 전반기 동안 네네트족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안이 계속되었다. 군사적 종속 관계, 무자비한 모피 공물 징수, 화폐경제의 영향 등으로 이들의 원시적인 씨족간 족외혼제도와 목초지 공동관리제도는 무너져갔다.
--- 「제8장 19세기 러시아제국 치하의 시베리아」, p.189
시베리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타이족이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경우에도 대개는 표피적인 변신이었을 뿐이다. 한편 러시아인이 알타이족 공동체에 더 깊숙이 전달해준 보드카는 그에 따른 희생자를 내기 시작하면서 많은 원주민들을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알타이족이 전에는 몰랐던 나쁜 짓들, 즉 도둑질과 사기 등은 이제 공공연한 일이 되었고, 러시아인이 가져다준 나쁜 점들, 즉 게으름과 불결함 등은 없어지지 않았다.
--- 「제8장 19세기 러시아제국 치하의 시베리아」, p.195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됨에 따라 이주자들에게 극동 지역이 완전 개방되었다. 1896~1912년에 거의 180만 명의 러시아인, 그 이상의 우크라이나인, 약 50만 명의 벨로루시인 등이 우랄산맥 서쪽 지역을 떠나 아시아 쪽 러시아를 향해 갔다.
--- 「제9장 19세기의 시베리아 식민지 이주민」, pp.201-202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으로 아무르 강 분지의 일부분을 점령했던 짧은 기간에 종말을 고한 러시아는 스타노보이산맥을 분수령으로 북쪽으로 밀려났다. 그 이후 러시아는 이곳을 국경선으로 준수하면서 중국 영토를 한 번도 침범하지 않았다. 1758년 아무르 강에 배를 띄우게 해달라는 러시아의 요청은 중국에 의해 거절됐고, 이 좌절은 반세기 동안 지속됐다. 그러자 러시아는 눈을 돌려 일본의 영역, 그중에서도 중요한 특성을 지닌 사할린에 주목했다.
--- 「제10장 19세기의 극동」, p.211
1853년 러시아 정부가 사할린 점령을 결정한 것은 영국과 미국이 극동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 내린 전략적 판단이었다. 토마리 쿠슌나이에 있는 일본의 거점들을 무시하면서 러시아는 섬 전체를 러시아제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되는 주장은 1876년 새로운 조약이 맺어지면서 해결됐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사할린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그 대신 쿠릴열도 전체를 할양받았다.
--- 「제10장 19세기의 극동」, p.212
17세기 말 만주족이 할하 몽골족을 정복한 이후, 만주족은 훌룬 호수와 부이르 호수 주변의 몽골 땅을 만주와 합병했다. 러시아의 트랜스바이칼 지역과 몽골의 국경지대라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만주족은 훌룬-부이르 지역을 수비하기 위해 바르가족, 다후르족, 솔론족으로 구성된 팔기군을 보냈고, 따라서 그 지역은 여러 민족들이 섞여 있는 양상을 보였다.
--- 「제10장 19세기의 극동」, p.215
극동 지역이 러시아제국에 공식적으로 합병된 이후 인두세, 병역, 기타 의무사항 등이 면제된 농민 이주자들의 비군사적 이주가 촉진됐다. 그 결과 19세기의 40년간 약 10만 명의 인구가 유럽 쪽 러시아와 시베리아로부터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의 새 식민지로 이주했다.
--- 「제10장 19세기의 극동」, p.224
중국인이 아닌 다른 동양인들은 다소 차별을 덜 받았다. 1910년경 한국인은 우수리 지방에 5만 1,000명이 넘게 있었고, 아무르 지방에는 약 1,500명 정도 있었다. 이들은 조용한 성격, 좋은 체력, 양심적 행동 등으로 좋은 이주자들이란 평판을 받았다. 이들은 주로 농민이거나 금광 노동자들이었으며, 특히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다. 따라서 중국인에게 노동 금지령이 내려진 후에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아무르 철도공사에서 일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인 농민들은 극동에서 많은 농토를 지닌 러시아인 코사크족보다 훨씬 더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한국인 이주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은 남부 우수리 지방, 즉 한국 국경 부근의 포시에트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였는데, 이곳에 20개가 넘는 한국인 마을이 있었다. 1912년 우수리 지방의 한국인 5만 7,200명 중에서 약 1만 7,500명은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공식적으로 러시아 시민으로 등록한 사람들이었다.
--- 「제10장 19세기의 극동」, pp.230-231
만주에는 그 이전부터 이미 수천 명의 러시아인들이 피해 와서 러시아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소비에트 세력이 시베리아를 점령하게 되자 또다시 많은 러시아인들의 탈출행렬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 극동에서 백계 러시아인의 탈주자 총수는 25만 명에 달했다. 이중에서 60퍼센트 이상이 만주로 이주했으며, 이들이 주로 정착했던 하얼빈 시의 경우 총주민 48만 5,000명 중 12만 명이 러시아인이었다. 이런 탈주와 망명의 분위기 속에서 하얼빈에서는 반볼셰비키와 애국 집단들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러시아 파시스트 조직으로 발전한 것은 1925년의 일이었다.
--- 「제11장 러시아 혁명과 시베리아에서의 내전」, p.245
비러시아계 주민들 중 러시아 내전의 영?을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파괴적으로 겪은 사람들은 아무르 강 하류, 연해주, 사할린 지역 등에 사는 주민들이었다. 즉 나나이족, 네기달족, 니브흐족, 오록족, 우데게족, 울치족, 한국인, 그리고 중국인 등이었다. 볼셰비키파가 최초로 권력을 장악한 1917~1918년 겨울과 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1922년 사이에 아무르 강 지역은 주인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한편 그 기간에 연해주 지역은 그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여전히 백군과 내전 참가국들--- 「특히 일본의 본부로 남아있었으며, 북부 사할린은 백군에 점령당했다가 적군에 다시 점령됐고, 1920년 일본의 침략을 받은 후 4년 동안 일본에 점령됐다.
--- 「제12장 1917~1929년의 원주민」, p.272
1926년 당시 러시아에 살았던 약 16만 7,400명의 한국인의 운명은 중국인의 그것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 역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자신들의 학교, 대학 그리고 하나의 극장을 갖고 있었다. 여러 신문들이 한국어로 발행됐으며, 한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포시예트 부근에는 한국인 민족 구역도 있었다. 농민이었던 이들은 1930~1931년 집단농장에 포함됐는데, 이들이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것은 이들의 농민적인 성격에 기인했을 것이다.
--- 「제14장 1930년대 소비에트 러시아의 극동 지역」, p.325
솔제니친의 언급에 의하면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한국인들은 다소 참고 견딜 만한 삶을 개척했으며, 그 후 1950년대의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에게 열린 교육 기회들을 이용하여 카자흐 공화국의 교육받은 계층의 주요 구성원이 됐다.
--- 「제14장 1930년대 소비에트 러시아의 극동 지역」, p.325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 지역에 퍼져 있는 아주 작은 원주민 공동체들은 유럽 쪽 러시아로부터 대거 밀려온 이주자들과 임시 체류자들 때문에 민족 자치 지역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의 새로운 정책들의 결과로서 이들 공동체 사이에서도 대중적 의견이 표출됐다. 니브흐족 작가인 상기는 최초로 자기 민족의 고통을 대중들에게 알렸으며, 1988년에는 진취적인 나나이족 여성인 가이에르가 모스크바에서의 최고 회의 위원에 선출되어, 삼림과 강의 사업적 개발 앞에서 생존이냐 사멸이냐의 갈림길에 놓인 나나이족, 울치족, 네기달족, 니브흐족의 문제들에 대해서 열렬히 연설했다.
--- 「제17장 1980년대의 시베리아」, p.406
또 하나의 해결책은 북부 지역 원주민들 스스로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동무들을 위해 일하는 날품팔이 노동자가 아니라’, 삼림, 강, 순록떼, 목초지 등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제17장 1980년대의 시베리아」, p.408
시베리아 원주민 공동체들의 미래를 위한 영토 및 행정 구조에 대한 문제들만큼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전통적 경제 기반에 대한 문제였다. 소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집단농장이 효율적인 생산과 행복한 삶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게 되자, 그 악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즉 장려책이 부여되는 농업경영에 가족 혹은 기타 작은 단위로 참여하는 경우, 가축 사육, 어로 및 수렵 등의 사업에서 개인 소유제가 다시 부활했다.
--- 「제17장 1980년대의 시베리아」, p.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