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지만 떨어지는 도중에 녹아들었다. 정오가 되자 벼랑 쪽에서 둔한 소리를 내며 눈 덩어리가 미끄러져 내렸다. 돈 건너편에서는 숲이 쏴쏴 소리를 질렀다. 떡갈나무 기둥의 얼음이 녹아 검은 살갗을 드러냈다. 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눈을 뚫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대지까지 스며들었다. 과수원에서는 벚나무 숲이 향기를 풍겼다. 취할 듯한 봄. 해빙기의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충돌질했다. 돈강의 얼음에 구멍이 뚫렸다. 강가 언저리에서는 얼음이 떠올라 흘러가고, 얼음 구멍은 풀빛의 밝고 맑은 물에 잠겨버렸다.
--- p.1092
모든 것은 그가 짐승처럼 키작크 구덩이 속에 몸을 숨기고 외부의 사소한 소리와 인기척에 마음 졸였던 며칠 동안에 결정났고 또한 검토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진실의 탐구와 동요와 변천과 고통스러운 내면의 투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그 흔적 또한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날이 비구름의 그늘에 덮인 것처럼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이제까지의 모색이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으로 여겨졌다. 무엇을 그리도 생각할 것이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몰이꾼들에게 쫓기는 이리같이 출구를 찾아 헤매고 모순의 해결을 찾아 우왕좌왕했던 것일까? 어차피 인생이란 그 날개 밑에서 편안히 쉴 수만은 없다는 진리는 애초부터 알지 않았던가. 지금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누구나 혼자만의 진리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만의 길이 있다고 여겨졌다. 한 조각의 빵을 위해, 몇 뼘도 안 되는 땅을 위해, 살아갈 권리를 위해서 인간은 싸워 왔다. 그리고 태양이 인간을 비추고, 혈관 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는 동안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 pp.1128~1129
그리고리는 프로호르와 함께 다섯 명의 카자흐를 데리고 앞으로 오고 있었다. 마치 그의 눈 속에 있던 들보를 떼어낸 것 같았다. 그는 공격전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이 세상을 비치고 있는 태양과 짚더미 옆에 녹고 있는 눈을 보고, 봄철의 지저귐을 듣고 발밑으로 스며드는 봄날의 은은한 향기를 느꼈다. 인생은 방금 전에 흘렀던 피로 퇴색하지도, 젊음을 잃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인색하고 기만적인 기쁨으로 더욱더 충동질하면서 그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눈이 녹아버린 검은 대지를 배경으로 한 줌의 구름이 한층 더 돋보이고 한결 더 매혹적으로 그 흰 빛을 떠올렸다.
--- pp.1171~1172
유년시절이 밝고 갠 날로서 두서없이 머릿속을 지나갔다─돌받침대 위에서 뜨거운 먼지에 싸인 그리샤의 다리, 거울처럼 풀빛 숲을 물에 비추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돈강, 친구들의 어린 시절 얼굴, 젊고 날씬했던 어머니……그리고리는 손바닥으로 눈을 쓸었다. 그러자 낯설지 않은 얼굴과 사건이─때로는 사소한 것인데도 무슨 까닭인지 기억속에 깊숙이 박힌 것이─마음을 꿰뚫고 지나갔다. 지금은 가고 없는, 잊었던 목소리와 주고받은 말의 한 토막과 특징 있는 웃음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왔다. 언젠가 본, 까마득히 잊어버린 광경이 기억의 빛으로 비춰져 갑작스레 눈이 부시게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드넓은 광야, 여름 길, 사륜마차, 마부석에 앉은 아버지, 암소, 무르익은 황금빛 밀밭, 거뭇거뭇하게 길 위에 날아와 앉는 흰부리까마귀떼…… 그리고리는 머릿속으로 그물처럼 얽힌 지나간 모든 것을 휘젓다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생활 속에서 문득 아크시냐와 부딪쳤다. ‘잊을 수 없는 귀여운 여인!’
--- p.1214
한 발 쏘고 나자 그리고리는 오리 떼의 날갯소리와 울음소리로 귀가 멀 지경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겨눈 오리는 당황해서 높이 날아올랐으며, 나머지 오리들도 빽빽이 무리를 지어 못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실망한 그리고리는 날아오른 무리를 쫓아가서 다시 조준하여 두 발 연거푸 쏘고 나서 어딘가에 떨어진 게 아닐까 하는 눈초리를 보냈으나 이내 프로호르를 향해 걸음을 옮겨 디뎠다.
“보세요! 저걸 보시라구요! ……”
프로호르는 안장 위로 뛰어올라 목을 늘이고 푸른 하늘 멀리 날아가는 오리 떼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리고리는 뒤를 돌아보다가 사냥꾼의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이제 완전히 열을 갖추고 있는 무리에서 오리 한 마리가 떨어져나와 직각으로 느릿느릿 날개를 파닥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손을 눈 위로 올리고 등을 바로 세워 그리고리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불안스러운 울음을 울고 있는 무리에서 떨어진 그 오리는 힘을 잃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는데, 이윽고 멀리에서 돌멩이처럼 갑자기 뚝 떨어졌다. 흰 날개 안쪽 털이 딱 한 번, 눈부실 만큼 햇빛을 받아 반짝 빛을 뿜었다.
--- pp.1219~1220
봄에 의하여 생명이 주어진 힘차고 솟구쳐오르는 듯한 약동(躍動)으로 가득 찬, 눈에 보이지 않는 생활이 스텝 속에 쫙 펼쳐져 있었다. 맹렬한 기세로 풀은 싹터 오르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눈에서 벗어나 작은 새들과 짐승들과 작은 동물 따위가 쌍쌍이 광야 속의 비밀스런 은신처에서 흘레를 하고, 휴한지(休閑地)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떨어진 이삭의 날카롭게 잘린 끝부분에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이미 삶을 마친 지난 해의 잡초인 대나물만이 광야에 흩어진 파수꾼들의 흙무더기 경사면 위에서 힘없이 등허리를 구부린 채 구원을 바라듯 어설프게 땅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상쾌한 바람은 대나물의 메마른 뿌리를 사정없이 상처 입히면서 휘익 불고 지나가 햇살을 받고 다시 살아나는 광야의 표면을 이리저리 달려 지나갔다.
--- pp.1277~1278
부락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벽돌로 지은 교회의 나지막한 종루는 빛깔 바랜 금박의 십자가를 푸른 하늘에 뻗치고 있었다. 듬직한 신부와 상인의 집들은 변함없이 부락 광장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반쯤 허물어진 코셰보이의 낡아빠진 오두막 위에서는 포플러나무가 한결같이 정겨운 말을 소곤거리고 있었다…….
단 한 가지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거리를 거미줄처럼 뒤덮은 다른 부락들과 다른 숨막히는 정적이었다. 길에는 어린애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집집마다 미늘창을 단단히 내려놓았고, 문에 자물쇠를 채워놓은 집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으나, 대개의 문은 활짝 열어젖혀져 있었다. 마치 전염병이 집집의 길에서 사람 자취를 빼앗아 가고 집들을 공허와 적막으로 채우고, 불길한 걸음걸이로 부락을 지나간 것 같았다.
--- p.1378
코셰보이는 도네츠로 피난한 상인들─모호프, 아테핀 차차, 비사리온 신부, 관구(管區)의 신부 판크라치, 그리고 부자 카자흐들 소유의 집 3채에 불을 지르고는 마침내 부락을 떠났다. 언덕 위로 접어들자 그는 말을 돌려세웠다. 눈 밑의 타타르스키 부락에서는 몸이 오싹할 만큼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시뻘건 불길이 여우의 꼬리 같은 불꽃을 흩뜨리고 있었다. 불은 확 타오르는 듯싶더니, 그 반사에 의해서 흔들리는 돈의 급류를 그물코처럼 비춰내고 다시 약해지면서 건물을 활활 태우며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동쪽에서 광야의 실바람이 불어왔다. 실바람은 불길을 불어 끄고는, 타버린 집 더미에서 새카맣고 석탄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잿가루를 멀리 실어갔다.
--- p.1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