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은 오늘의 뮌헨도 사랑할 것이다
레오폴드 거리에는 전쟁 이전에 지어진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깔끔한 모습으로 보수되고 단장되어 서 있다. 가끔씩 보이는 현대식 건물은 고건물 일색인 경관을 시각적으로 거스르지 않게 설계되었고 품위 있으면서도 부티를 풍긴다. 뭐 하는 곳인가 하고 가까이 가서 조그맣게 달린 팻말을 읽어보면 세계 유수의 대기업인 경우도 있다.
나는 학생회관 건물을 지날 때마다 전혜린이 뮌헨에 도착한 첫날이 생각난다. 여기서 꼬불꼬불한 연필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는 그녀의 월세방이 어딘지 불현듯 알고 싶어진다. ‘그 끔찍하게 낡은 건물은 학교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영국 공원에 면해 있다… 방은 영국 공원과 반대쪽으로 나 있다…’라는 대목만으로 레오폴드 거리와 영국 공원 사이에서 전쟁 전에 지은, 남북 방향으로 뻗은 4층 건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전혜린이 50년이 지난 오늘의 뮌헨을 보면 무어라 할지 궁금하다. 맑은 정신을 숭상하고 물질을 경멸했던 스토아적인 그녀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의 뮌헨의 거리에는 너무나도 경박스러운 돈 냄새와 신흥부자의 냄새가 날지 모른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장치의 뒤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옛날의 슈바빙 정신이 아직도 조용히, 그러나 꾸준하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녀가,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뮌헨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pp.146-148
서양의 굴뚝, 잔혹한 유아노동의 상징
1800년경의 북부 독일에서는 몸집이 작은 13~16세의 소년들이 굴뚝청소를 했으므로 굴뚝의 단면이 작았고(내부 각 변 35~40센티미터), 남부 독일에서는 굴뚝의 내부 각 변을 최소 50센티미터로 정해 성인들이 굴뚝청소를 하도록 했다.
……원형이 보존된 옛굴뚝을 발견하는 순간, 지붕 위에 서서 다리 하나를 굴뚝에 척 걸쳐놓고 인자하게 웃는 산타할아버지의 환영을 떠올리는 대신, 허겁지겁 기어들어가서 내가 알아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인권이다. 어린이의 인권.
……크리스마스와 함께 낭만적으로 연상되는 굴뚝의 역사 뒤에는 이렇게 많은 어린 생명을 죽음으로 이끈 참혹한 유아노동의 역사가 숨어 있다. 그래서 나의 뇌리에는 굴뚝이 어린이를 위한 선물의 상징이 아니라 어린이를 착취하는 상징으로 박혀버렸고, 어린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그리로 드나든다는 산타할아버지를 차마 떠올리지 못한다. --- pp.311-317
서양 건축 양식을 쉽게 구별하는 법
서양의 중세 건축을 이루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창문이나 문 등 벽에 뚫리거나 패인 구멍의 형태를 보면 된다. 피사의 사탑의 창문같이 윗부분이 둥글게 마무리되었으면 로마네스크고, 노트르담같이 뾰족하게 마무리되었으면 고딕이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원형 천장과 회랑도 로마네스크에선 둥근 선으로, 고딕에선 뾰족 선으로 마감되어 있다.
……인간이란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단아한 르네상스의 건물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장식을 선호하게 되고 화려한 양식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크 양식이다. 17~18세기니까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후기다. ……신로마네스크, 신고딕, 신르네상스, 신바로크, 신고전주의를 거쳐 19세기 후반에 가서는 절충주의라는 사조까지 나왔다. 한 가지 양식을 선택하여 본따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여러 양식 중에서 마음에 드는 모티브를 어려 개 따와서 조합하는 절충주의를 관찰하자면, 20세기 후반부터 우리들의 귀에 익은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 pp.249-253
학자의 상상력으로 한 톨의 숯조각을 남기고 싶다
나는 밤이면 자주 공사현장에 나갔다. 밤에 혼자 조사한 것은 작업시간으로 계산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 일은 경제적으로 형편없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다. 대신 나는 시간에 쫓긴다는 초조감과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차근차근 조사할 수 있었다. 그 길만이 나의 존엄성을 되찾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말단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학술계의 구조에 대해 논하자면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시방 남의 나라 학술계의 정의실현까지 염려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가 만약 다른 장작의 화려한 연소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불쏘시개라면, 재도 없이 타버리는 삭정이보다는 이왕이면 속이 단단한 나뭇가지가 되어 한 톨의 숯조각이라도 남기기를 원했다. 상단에 오른 굵은 장작이라 할지라도 속이 무르면 불길만 요란할 뿐 숯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남기고픈 숯은 나의 학문적 실적뿐 아니라 정신적인 실속, 즉 나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는 만족감이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시 찾은 나는 일터에서의 행복을 되찾았다.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