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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원이야기 세트

비원이야기 세트

[ 전2권 ]
리뷰 총점10.0 리뷰 51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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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1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980쪽 | 148*210*40mm
ISBN13 9791104910166
ISBN10 110491016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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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마다 납덩이를 달아 묶은 듯 무거웠다.
아마 원치 않는 인연을 강요받았던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비록 자신이 혼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아비가 다른 여인과 혼인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마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는 아비의 품에서 잠자듯 숨을 거둔 어미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입안이 썼다. 먼발치서 언뜻 본 아비의 얼굴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언제고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그에게도 보여주었던 그 얼굴. 그러나 아비는 더는 그에게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았다.
“전하, 중전마마. 세자저하 입시옵니다.”
“들라 하라.”
여전히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대전의 웅장한 문이 열렸다.
끼익-
“저하, 드시지요.”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내관에게 힘없이 웃음 지은 그는, 내디딜 때마다 수렁으로 빠지는 것만 같은 발을 애써 떼어 들어갔다.
“……소자, 아바마마와 중전마마께 첫 문안 여쭈옵니다.”
그가 인사말을 건네고 큰절을 올렸다. 언제나 아비에게 냉대받던 그지만, 오늘은 아비 곁의 낯선 여인 덕에 조금이나마 아비의 면을 뵈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앉아라.”
그가 단정히 옷자락을 매만지고, 내관이 내어준 방석에 정좌하자마자 아비의 꾸중이 날아왔다.
“이제야 문안을 온 게냐? 해가 중천인지 오래거늘!”
“송구하옵니다. 소자는 아바마마께서 국혼 후 피로하실까 그것이 저어되어…….”
“변명은 그만두어라! 이 국혼을 탐탁지 않아 하는 네 불효함이야말로 익히 아는 바이니.”
“아바마마, 아니옵니다! 그것이 아니오라…….”
다급한 마음에, 세자 혼(琿)은 방바닥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떼어 아비를 바라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뵈온 용안은 어느덧 저물어가는 노옹(老翁)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을 먹을수록 너그러워지고 자애로워지는 남들과는 달리, 아비의 이마에는 짜증이 한가득 아로새겨져 있었다.
반면, 세월에 시든 아비 옆에는 어울리지 않는 홍안(紅顔)의 앳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언뜻 보면 조부와 손녀딸로 착각할 법도 하였다. 그다지 절색은 아니었으나, 월계화(月季花)를 닮은 발그레한 피부에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퍽 사랑스러웠다. 더구나 혼을 마뜩잖아 하는 아비를 만류하듯 늙고 주름진 어수(御手)를 두 손으로 감싸 잡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전하, 이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세자가 자식 된 도리로 어버이를 생각하여 그리하였다 하지 않습니까.”
혼의 미간 사이가 자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다고는 들었지만, 저리도 연소할 줄이야! 하가(下嫁) 전까지 저에게 매달려 색실 장난감을 만들어달라 조르곤 하던 이복 누이 정혜와 동년배라고 들었는데, 어째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치렁치렁 땋아 두른 가체에 내려앉은 화려한 나비 모양 선봉잠, 세 마리 금빛 봉황이 자리 잡은 화려한 연두 당의에 붉은 치마. 오늘부로 혼의 새어머니이자 조선의 국모가 된 그녀는 중전이라기보다 차라리 공주나 옹주 같았다.
“쯧…….”
자신을 달래듯 손을 맞잡은 어린 아내의 만류에 아비는 혀를 차며 혼을 쏘아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스물일곱 해를 함께한 아들에게는 엄동설한 칼바람 같은 아비이건만, 고작 하루 함께한 월계화에게는 사근사근 품어 드는 봄바람 같았다. 늦바람에 얻은 어린 중전을 어찌나 귀애하는지, 혼은 자신이 알던 아비가 아닌 것 같아 어색했다. 그는 부러움, 어색함, 섭섭함이 복잡하게 뒤섞인 눈빛으로 멍하니 우두망찰했다.
혼의 눈빛을 알아차린 어린 중전의 눈매가 곱게 반달로 휘었다. 저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어미는 승자의 기쁨에 한껏 도취되어 있었다. 어린 중전의 요요한 미소에 혼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매무새를 바로 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네 아무리 아바마마의 총애를 받는다 하여도 나는 국본(國本)이다. 주상전하의 뒤를 이을 당당한 세자니라. 불안한 듯 두근대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그는 어린 중전의 존재감을 지우려 애썼다.
“전하, 세자가 피곤한가 봅니다. 기왕지사 좀 더 일찍 왔으면 주수라라도 함께 들었을 것을. 안타깝지만 이만 물러가라 하소서.”
어린 중전은 살풋 웃는 낯을 하고서는 아비의 앞에서 교묘하게 혼을 꾸짖었다. 언제 자신을 보았다고, 아홉 살이나 많은 아들에게 자연스레 하대하는 양이 사뭇 당당했다. 비록 어린 연식이나 이제는 네 어미이거늘, 어찌 정성을 다하지 않느냐 돌려 책망하는 것이리라.
“이만 가거라!”
“……차후 저녁 문후 들르겠사옵니다.”
“올 것 없다! 네 불충불효한 낯빛이라면 더 보고 싶지도 않으니.”
매양 듣는 아비의 역정에 이골이 날 만도 하건만, 가시 돋친 어성(御聲)은 잘 벼려진 검처럼 심장을 찔러댔다. 가까스로 아문 자상(刺傷)이 또다시 터져 검붉은 원망을 울컥 토해내는 듯하였다.
말없이 일어나 예를 갖춘 후 혼은 뒷걸음질 쳐 방을 나왔다. 신발짝을 아무렇게나 꿰어 신고 섬돌 아래로 내려오기가 무섭게 처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리도 자상하게 웃어주시던 아바마마께서, 그리도 상냥하시던 아바마마께서!
혼이 아비 대신 왜인들의 무자비함에서 백성을 구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라를 건져 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든 바람은 아비의 칭찬이었다. 언젠가 어렸을 적,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음식이 무엇이냐 하문하셨을 때 소금이라 대답하니 참으로 총명하다며 어루만져 주던 따스한 칭찬을 기대했다.
하나 그러기엔 아비의 마음은 여유가 없었다. 제 아들 하나 품지 못할 만큼, 조급하고 옹졸했으며 무능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던 어미를 잃고, 점점 차가워지던 아비는 이제 혼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마치 왕위를 빼앗은 원수 대하는 양 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화마가 아바마마의 다정까지 앗아버린 것일까. 좀 더 내가 노력하면 돌아오실까. 안아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던 아바마마로 돌아오실까.’
대전을 나오자마자, 왈칵 쏟아질 듯 고이는 눈물 탓에 처소로 곧바로 돌아가지 못한 혼은 아무 곳으로나 발걸음을 옮겼다.
몇 시진째 어지러이 정처 없이 떠돌던 혼의 발걸음은, 마침내 조용한 한 전각 앞에 가 섰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였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비의 뒤를 이을 세자라 한들, 아비의 마음 없이 왕위를 얻어 무엇하겠는가. 처음부터 왕위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세자보다는 아비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차라리 아비의 마음을 얻고, 이까짓 저위(儲位) 따위 누구에게나 넘겨주고 싶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미 마음속으론 수천수만 번 눈물 흘린 상처를,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는 상처를, 가까스로 가만가만 끌어안아 덮으려던 혼에게, 순간 지금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세자가 아닙니까?”
월계화였다.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 붉은 치맛자락을 사락거리며 조금 떨어진 곁에 와 섰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은 혼은 애써 효자의 낯을 하려 들지 않았다. 어리디어린 주제에, 국모가 되었노라 으스대는 양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아까 아비의 앞에서 얄궂게 군 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궁궐이 낯설어, 조금이라도 더 익혀보려고 나왔습니다. 산책 겸해서요. 어찌나 익힐 게 많던지, 내 이렇게 숨을 트이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지 뭡니까. 한데 세자는 어찌하여 이곳에 있습니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조잘조잘 말을 건네는 양이 당당하다 해야 할지, 간사하다 해야 할지.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힌 혼은, 이내 눈에 비웃음을 담고 입을 열었다.
“아실 것 없습니다. 가던 길 가시지요.”
씹어뱉듯이 대답하고는 혼은 재빨리 몸을 돌려 월계화에게서 멀어졌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아비의 다정을 갈망하는 자신의 치부를 들킬까 염려한 탓이었다. 혼은 한편으론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여인에게 이러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였다. 아비의 사랑을 놓고 옹졸하게 투기나 하는 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세자, 멈추어보세요!”
또 무어라 속을 뒤집어 놓을지, 왜인지는 모르나 그 의도는 뻔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생각한 혼은 미동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자!”
‘참 어지간히도 귀찮게 하는군. 앞으로 이곳엔 눈길도 아니 주어야겠어.’
그때였다.
“날 무시하지 마!”
혼이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몇 발짝 뗀 순간 갑자기 앙칼진 계집아이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혼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자신에게 하대를 하던 월계화, 중전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감정을 참지 못하는 계집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너도 날 비웃는 것이냐? 권세를 탐하고 왕위를 탐해, 재취(再娶)로 들여보낸 계집이라 비웃느냔 말이야!”
기품으로 차리던 낯빛은 치맛빛을 닮아 붉어졌고, 당의 속에 숨겼던 양손은 어느새 빠져나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하나 우습기도 하지. 첫 대면부터 시종일관 비웃고 무시한 것은 오히려 그녀였을진대, 어찌 내게 자신을 비웃느냐 소리친단 말인가!
혼은 어이가 없어 발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몸을 돌려 그녀에게로 되돌아갔다.
“어찌 중전께선 나를 책망하십니까. 그는 애초부터 중전께서 자초하신 일이 아닙니까? 하면 내가 어마마마라 칭하며 받들어 모시기를 바랐습니까?”
예를 차리고 싶지도, 잘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어미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눈앞의 월계화는 어미가 아니라 여우였다! 아비의 정을 빼앗고, 부자를 가로막는 여우!
결국 혼은 붉은 치마에 물든 그녀의 낯빛처럼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실어 외치고 말았다.
“나는 네 어미다! 이젠 내가 국모요, 네 계모야! 한데 어찌 이리도 오만방자한 것이냐! 가세(家勢)가 한미하면 이리 어미를 능멸하는 것이 궁궐의 법도란 말이냐!”
하나 어느새 그녀는 물까지 어린 낯을 하고서 자신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혼은 잠시 당황스러웠다. 제가 언제 그녀의 가세가 한미하다 무시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없는 말까지 지어내 내 항복을 받으시겠다?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그대는 내 모후가 아니오. 그러니 보는 눈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내게서 공대(恭待)조차 바랄 수 없을 것이오.”
혼은 흥분과 진심이 반씩 섞인 말을 내뱉고는 코웃음을 치며 충격으로 시든 그녀를 재빨리 지나쳐 처소로 돌아갔다. 혼에게 궐은 얼어붙은 엄동설한 같았으나, 상처받고 지친 마음을 뉘일 방 한 칸이 오늘만큼은 너무나 절실했다. 고된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혼이 떠난 발자국만 남은 전각 앞. 치맛빛이 낯을 넘어 하늘까지 물들일 때까지 중전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수치심과 자괴감이 엄습했다.
그녀의 친정은 무거운 가문의 이름에 비해 가세가 그리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 김제남은 유약하여 대인군자가 못 되었다. 하여 내로라하는 집안에 그녀의 혼사를 청했을 때, 명문가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일언지하에 혼사를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날 무렵에야 그녀는 부친이 혼담을 연이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치스러웠다. 열일곱 살이 넘도록 시집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며 늦은 밤 자신에게 눈물짓던 아비가 가여웠다. 그래서 임금의 계비로 간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왕성(王性)과 상극이라 간택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기적적으로 간택되었다. 국혼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지만 왕의 성은으로 정전(正殿)에서 만조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으며 불길함을 털어냈다.
나는 당당한 국모이니라. 가문 또한 이제 왕비의 친정이니, 가족 모두가 떳떳이 어깨를 펴고 다니며 칭송받으리라.
그러나 후궁뿐만 아니라 궁녀들마저 그녀를 무시했다. 상궁나인들은 수군거렸고, 연배 있는 후궁들 더러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런 낯빛을 띠며 쳐다보기까지 했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손녀 같은 비라며 비웃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시기 어린 투기일 뿐이니. 스스로를 그렇게 달랬다. 그러나 세자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새 국모, 어린 왕비의 지위를 당당히 반증해 줄 장성한 세자였다. 한데 첫 문안에 늦었을 뿐만 아니라, 어미로서 가볍게 질책하였다 하여 노골적으로 능멸하다니! 이는 분명 보잘것없는 가세를 보고 나와 내 집안을 무시하는 처사이리라!
어느새 어둑해지는 하늘을 이고, 중전은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

“주상전하 듭시오!”
중궁전의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눈빛을 한 왕이 발걸음을 내디뎌 용안을 보였다. 궁녀들이 보아둔 자리에 얌전하게 앉아 있던 그녀는 재빨리 치맛자락을 모아 쥐고 일어나 지아비를 맞이했다.
“전하.”
“오, 중전. 과인이 일이 있어 좀 늦었소.”
“노곤하시겠사옵니다. 어서 좌정하시옵소서.”
상궁들의 수군거림을 듣자 하니, 지아비는 오늘도 세자와 관련하여 조정 대신들과 언성을 높였다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이나마 빈틈을 보이지 않던 지아비의 눈빛에는 완연히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안쓰러웠다. 비록 어릴 때부터 꿈꾸던 귀공자도, 수려한 사내도 아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나름대로 노력하는 지아비였다. 한낱 계비의 국혼에, 정전에서 하례까지 허용해 준 지아비가 아니었던가. 어리고 한미한 그녀의 위신을 지켜준 것만 해도, 조부뻘 지아비에게 시집가게 되었다는 어머니의 한숨 섞인 걱정 따윈 단번에 잊고 말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외로운 늙은 왕에게 지어미로서, 국모로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겠다고. 힘들고 어려운 정사에 지친 궁궐에서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겠다고.
지아비의 고단한 육체에서 무거운 용포를 벗겨내며, 동시에 그녀는 아까 낮에 세자가 주었던 능멸을 생각하였다. 그녀가 허울뿐인 왕비 대신 당당한 왕의 지어미가 되면, 제아무리 세자라 한들 그녀를 더 이상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아홉 살이나 어린 어미에게 깍듯이 존경을 표해야 할 것이었다. 더불어 잠깐 보았던, 오만하기가 세자 못지않았던 세자빈 또한 자신을 왕실의 웃어른으로 모시게 되겠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앙다물며, 어린 중전은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부지런히 왕의 자리옷을 손수 준비했다. 작은 일이라도 자신이 손수 챙겨 지아비에 대한 성의를 보이고 싶었다.
“어찌 오늘은 중전도 피로한 듯싶소.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의복을 정제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왕이 말을 건네왔다.
“아…… 아닙니다, 전하. 신첩…….”
“하긴, 국혼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긴장감이 적잖을 것이오. 그러나 모쪼록 적응하도록 하시오. 중전은 이제 국모가 아니오.”
속내를 들켰을까, 다급히 말을 이어 붙이려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왕은 제 할 말을 했다. 머쓱했으나 그녀는 국모라는 단어가 주는 뿌듯함에 재빨리 현숙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섬세한 금빛 나비대의 불빛이 사그라지자 왕과 중전은 넉넉한 이부자리에 함께 들었다. 초야도 아니건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이 되었다. 아니, 그때는 어렵고 어려운 분위기에 눌려, 벌벌 떨던 그녀 때문에 왕이 제대로 된 합궁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금야(今夜)가 진정한 초야가 될지도 몰랐다.
어둑한 방 안에서, 힐끗 곁눈질로 지아비를 훔쳐본 그녀는 긴장감에 어깨를 딱딱히 굳힌 채로 괜히 베갯머리만 정리했다. 이미 먼저 누운 지아비 곁에 눕기가 어쩐지 망설여졌던 탓이다.
‘아이 때부터 그려왔던 낭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탓도 있을 테지.’
역시 밤의 적막함은 낮의 결심을 미혹하는 마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왕비임에 족하다 다짐했던 것과는 모순된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들자, 그녀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머금으며 이부자리에 누웠다.
아니, 그녀가 이부자리에 누우려 잠깐 몸을 왕에게 밀착시키는 찰나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왕이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몸의 균형을 잃고 어머나, 작은 비명이 앵두 같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찰나, 그녀의 작고 싱그러운 몸은 왕에게 쏟아졌다.
“저…… 전하?”
엉겁결에 왕의 옥체에 한껏 안긴 모양새로, 그녀는 당황하여 지아비를 불렀다. 작고 여린 몸을 움켜 안은 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나직이 속삭였다.
“내 연소한 그대를 이토록 막중한 자리에 앉도록 해 미안하오.”
“어…… 어찌 그러시옵…….”
“그러나 이미 국모가 된 이상, 그 소임을 다해주었으면 좋겠소.”
“저…… 전하.”
“과인이 그대에게 원하는 것은, 원자요.”
원자(元子)!
지아비에게는 이미 장성한 아들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나, 그중 왕비의 아들인 원자는 단 한 이도 없었다. 그렇기에 후궁의 차남인 세자가 후계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아비는 세자를 탐탁지 않아 했고 그 사이도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에서도 세자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아비는 지금 자신에게 원자를 바란다 속삭이고 있는 것이었다.
‘어…… 어찌…… 전하께선 이미 세자가 있지 않으신가? 그런데 내게서 원자를 얻고자 하심은…….’
비록 낮의 일을 겪어 세자가 결코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지만, 이미 장성한 세자가 있는데도 구태여 원자를 원한다는 왕의 급작스러운 말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였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과는 상관없이, 왕은 손을 뻗어 그녀의 저고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몸에 와 닿는 사내의 손길에 퍼뜩 정신이 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수(御手)에서 앞섶을 슬쩍 빼내었다. 익히 짐작한 금야였지만, 두려운 것은 막을 방도가 없었다. 둔부를 반대편으로 빼내어 상체까지 도망치려던 찰나, 억센 사내의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붙들어 끌어당겼다.
여직 눈을 감고 있던 왕은 천천히 눈을 뜨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다 자신에게 밀착시키고는 담담히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의 몸에서 난 원자는 세자가 될 것이오.”
세자!
담담한 지아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히 울려 퍼졌다. 세자라는 단어는 너무도 달콤했다. 왕의 후계자! 잘난 것 없는 내게서 왕께선 세자를 보겠다 하셨다!
온갖 수모를 당하는 아버지, 한낱 궁인들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낮에 보았던 세자의 비웃음까지 떠올랐다.
한껏 긴장했던 육체가, 밤의 마력을 담은 한 단어에 부드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와 닿는 손길과 입술을 느끼며 그녀는 부푼 기대를 안고 눈을 감았다.
어느 날, 조선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일 년 후.
“아아아악!”
아직 깜깜한 하늘을 인 새벽녘, 갑작스러운 비명에 중궁전이 발칵 뒤집혔다. 해산일이 멀지 않았던 중전이 진통을 시작한 것이다. 고요하던 중궁전은 환히 불을 밝혔고, 허겁지겁 걸음을 옮기는 어의와 의녀들, 종종걸음으로 더운 물과 흰 천 등을 들여가는 나인들로 부산했다.
“흐흑…… 아…….”
생전 처음 겪는 아픔에, 중전은 고통보다도 혼미함이 더했다. 첫 회임인 터라, 잠결에 미약하게 느껴졌던 진통을 무시하였더니 몇 시진째 진통이 이어져 이제 곧 해산하게 된 것이었다.
“마마,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옵소서. 이제 다 되었습니다!”
사가에서 급히 소식을 듣고 입궐한 중전의 어미 노 씨가 땀범벅인 중전을 독려했다.
“마마, 잘하셨사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힘을 주시…….”
“아아아아악!”
잠시 잠잠해졌나 싶던 고통이, 순간 복부를 강타하듯이 날카롭게 찾아왔다. 잠시 숨을 고르던 중전은 벼락을 맞은 듯한 고통에 허리를 급격히 꺾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앙!”
갓난아이의 낯선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아기를 받은 의녀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마마! 아기씨께서 나오셨습니다!”
“하…….”
의녀가 자그마한 아기를 보에 싸 안겨주자, 중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정녕…….”
마침내…… 마침내! 결국 내 아이가 탄생했구나.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는, 중전이 손을 내밀어 뺨을 쓰다듬자 서서히 울음을 그치고 말똥말똥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노 씨와 의녀들은 참으로 온순하신 아기씨이시다, 웃음 지었다.
“마마, 아기씨께서는 마마보다 훨씬 온순하신 듯합니다. 마마께서 태어나셨을 적엔 제가 달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십니까.”
지친 딸이 아이를 쓰다듬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노 씨가 축하하려 말을 꺼내었다. 그러자 중전은 온몸이 방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한 피로감 속에서도, 만족감에 미소하며 말했다.
“어머님, 이 아이는 앞으로 국본이 될 몸이거늘 어찌 온순한 것이 좋다고만 하겠습니까. 앞으로 더 강인한 면모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말은 엄격하게 하였으나, 세자가 될 아이라 어여뻐 보이는 것만은 숨길 수 없었는지 중전의 눈에는 피로함과 함께 뿌듯함, 사랑스러움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노 씨와 의녀들의 낯에는 당혹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의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노 씨는 국본이라는 단어를 듣자 눈에 띄게 당황하였다.
“저…… 마마. 어찌 국본을 입에 담으십니까.”
“그거야, 정궁 소생의 왕자가 태어났으니 당연히 전하께서…….”
노 씨는 눈앞이 아찔했다. 이 아이가 어쩌자고…….
“마마, 왕자 아기씨가 아니라…… 공주 아기씨이옵니다.”
“……예?”
회임 후 첫 진맥을 받았을 때부터 지아비와 자신은 당연히 왕자일 거라고 확신했다. 입맛하며 나온 배의 모양까지 틀림없는 아들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머님, 어의도 분명 왕자일 거라고…….”
충격에 빠진 딸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한 노 씨는 의녀에게 아이를 데려가 씻기라 눈짓했다. 충격에 빠진 중전을 곁눈질하며, 의녀 둘은 아이를 안아 올려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로 조심스레 데려갔다. 이윽고 보가 벗겨지고 아이의 작고 연약한 몸이 드러났다.
“아…….”
자신을 보자 울음을 멈춘 영민한 아이였다. 자신을 닮아 선홍빛 상아색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무엇보다 부드럽게 새겨진 눈매가 아비를 빼닮은 아이였다. 누구나 왕의 용안을 본 자라면, 이 아이가 왕의 자식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눈매가 왕과 꼭 닮은 아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이는 음양(陰陽)의 분별까지 아비를 닮지는 못했다.
‘공주라고?’
온몸에 피로함이 아로새겨져 있던 중전은 뜻밖의 충격에 멍해져, 간신히 붙들고 있던 정신을 까무룩 놓아버렸다.
“아이고, 마마!”
“주…… 중전마마!”

**

눈을 떴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중전은 힘없이 눈을 깜빡거리면서도, 평소와는 다른 이질감에 천천히 방 구석구석을 탐색하듯 뜯어보았다. 자신이 누워 있는 정갈한 이불, 정리된 경대와 서책, 가지런한 보료까지. 평소와 다를 것도 없건만 왜 이리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중전은 무심코 이불자락을 젖히고 몸을 일으키다, 제 옆에 자리한 자그만 이불 뭉치를 발견했다.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아니, 그것은 이불 뭉치가 아니라 자그만 갓난아이였다. 아이는 피곤한지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아.’
그제야 문득 배를 더듬어보니, 수 개월간 불룩했던 모양새가 꽤 납작해지고 한결 가벼웠다.
‘이 아이가……. 내 아이. 공주라고.’
중전은 손을 뻗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설핏 잠이 들었던 아이는 안아 드는 손길에 눈을 반짝 떴다. 중전은 왕자가 아닌 공주라는 사실에, 실망과 기쁨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이었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방긋 웃음 지었다. 일순 아이의 웃음에 중전은 화들짝 놀랐다.
어째서 왕자가 아닌 공주냐는 원망 어린 물음을 꿈속에서 수십 번 외쳤던 듯싶다. 하나 그런 어미의 원망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천진한 웃음을 보자, 중전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앙금이 사르르 풀려 아이를 좀 더 품안에 꼭 당겨 안았다.
“아가.”
중전은 가만히 아기를 불러보았다. 아직 이름이 없어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그 흔한 단어 속에는 어미만이 담을 수 있는 애정이 슬쩍 묻어나 있었다. 어미의 목소리를 들은 아기는, 스르르 눈이 감기며 잠이 어린 눈매를 하고서는 자그맣게 웃음 지었다.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너무나도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든 아기를 보며 중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의지할 곳 없이 외톨이인 궁에서, 심지어 지아비인 왕조차 외로움을 막아주지는 못했던 궁에서, 오직 자신이 전부이고 자신에게 의지하는 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중전이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려 아기를 고쳐 안는 참이었다.
드르륵-
“일어나시었소?”
“저…… 전하.”
성큼성큼 들어온 왕은 몸은 괜찮으냐 물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이를 안은 채로, 엉거주춤 일어났던 중전은 강한 죄책감을 느끼며 도로 이불 위에 앉았다.
“전하, 신첩이 미거하여…… 왕자를 생산치 못하고…….”
도저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중전이 아이를 감싼 보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찌하겠소, 하늘의 뜻이 그런 것을. 그러나 국혼 후 이리 빨리 아이를 생산했으니, 원자도 하루빨리 생길 것이오.”
“예……. 송구하옵니다.”
빈말로라도, 왕자나 공주나 모두 나의 자식일진대 어찌 그러느냐 위로해 주길 바랐다. 하나 자신 또한 용종(龍種)이 아들일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기에 중전은 애꿎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그러다 퍼뜩 생각난 듯, 중전은 품에 안긴 아이를 왕에게 내밀었다.
“공주가 전하를 쏙 빼닮았사옵니다. 보시옵소서.”
“흠…… 그래. 이 아이가 과인의 하나뿐인 적녀로고.”
특별한 기대는 하지 않는 듯한 왕이었지만, 처음 얻은 정궁 소생이니 호기심이 동한다는 듯 아이를 받아 안았다.
“호…… 정말 나를 닮긴 했구려. 특히 이 눈매가.”
그러나 이내 왕은 아이를 중전에게 돌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과인은 처리할 일이 있어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모쪼록 몸조리 잘하시오.”
“전하! 벌써 가시옵니까?”
“내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단호한 목소리, 심지어 실망감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무관심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원자만을 갈망했다 한들, 첫 적녀이고 용안을 쏙 빼닮은 공주인데 어찌 저러실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이름이라도 지어주시옵소서. 아직 공주의 이름도 없나이다.”
한껏 당황한 중전은 아이의 이름을 핑계 삼아 왕의 발길을 잡아두려 애썼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왕자를 낳지 못하면, 원자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중전이란 허울 좋은 이름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름이라…… 중전께서 알아서 짓도록 하시오. 어차피 후에 봉호를 내릴 테니.”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당장에라도 중궁전을 떠날 듯한 왕의 모습에 중전은 당황하여 외쳤다.
“……연리(連理)! 연리가 어떻사옵니까?”
“연리……. 혹 연리지(連理枝)를 이름이오?”
의외라는 듯, 왕이 방문을 향하는 발길을 돌려 공주를 안아 든 중전을 응시했다.
“예, 전하. 연리지는 지극한 효성을 상징하는 나무라 하지 않습니까. 공주도 효를 다하는 딸이 되란 뜻에서…….”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듯, 열심히 고사까지 들어가며 설명하는 중전을 바라보던 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부부간의 돈독한 연정으로 더 잘 알려진 나무일 터인데?”
속마음을 간파당한 듯 중전은 대번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주를 낳은 것이 원자 생산에 있어 왕과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주기를 희망했기에 공주의 이름을 그렇게 짓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원자를 생산하지 못해도 왕이 여전히 자신을 아껴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왕께서 나를 귀히 대하는 것이, 원자 생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아껴서라고 믿고 싶었다.
중전이 얼굴을 붉힌 채로 아무 말도 못 하자 방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하시오.”
침묵이 어색하게 깔리던 중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중전은 붉게 상기된 얼굴에 흥분이 담긴 눈동자를 하고 용안을 바라보았다.
“전하…….”
왕이 중전의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왕은 공주의 이름을 허락하여 준 것이었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왕은 다시 중전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품에 안긴 공주의 뺨을 살짝 쓸어보고는 중전에게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하나, 그만큼 중전께선 더 노력해야 할 것이오. 내 말하지 않았소?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 것은 원자라고.”
공주의 이름을 허락한 것은 왕이 중전을 아껴서도, 연리지처럼 연모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원자를 위해서였다.
바람처럼 잠시 머문 왕이 중궁전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중전은 비로소 자신이 차가운 현실에 내던져졌음을 깨달았다.
원자. 원자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속삭이는 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중전은 오소소 몰려오는 슬픔에 몸을 떨었다. 오로지 중전의 품에 안긴 공주만이, 세상일과는 상관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

쨍-
달빛을 닮았다 하여, 월옥(月玉)이라 불리던 연적이 세차게 부서져 빛가루를 내었다. 평생을 귀한 보물이라 떠받들어지기만 했던 이 가련한 물건은 제 처지가 이리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상선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 귀히 여기던 것을, 이리도 집어 던져 무용지물을 만드시다니. 이제 또 어디서 저만한 연적을 구한담.
부복하여 엎드린 혼의 손에 빛가루가 묻었다. 혼에게 그것은 보물의 자취가 아닌 가슴 시린 눈물 자국이었다. 도무지 견디기가 어려웠다. 대체 내가 무엇이 부족하여! 차마 입술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망이, 도리어 그의 심장을 파고들어 난자했다.
“세자? 네 정녕 스스로를 세자라 생각하는 것이냐?”
“…….”
“넌 그저 전란을 막기 위해 세워둔 허수아비일 뿐이다. 국본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이름이지. 차후로 세자랍시고 매일 하는 문후도 그만두어라.”
“아바마마!”
아비가 매번 자신을 불효하다 꾸짖었어도, 부족하다 비난했어도, 부왕의 뒤를 이을 국본이니 참아야 한다 되뇌며 견뎠다. 그러나 아비는 이제 자신의 명분이자 최소한의 위안마저 거두겠노라 하였다.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다!”
무어라 항변할 말도 찾지 못해, 그저 월옥이 묻은 손을 덜덜 떨고만 있자 상선이 그에게 눈짓을 주었다. 지금은 심기가 불편하시니, 나중에 다시 오시지요.
상선의 눈에 서린 감정 또한 동정심이나 안타까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미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그러한 익숙함은 세자의 위엄을 서서히 흠집 내는 낙숫물과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바위도 매일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고 있노라면 언젠가는 구멍이 뚫리게 마련이다. 이처럼 아비의 냉대가 심해질수록, 상선은 물론이고 대소 신료들마저 혼을 쉬이 여겼다. 그리고 혼은 이미 그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어전(御殿) 댓돌에 내려서던 혼이 휘청거렸다. 힘없이 내려서는 발걸음에, 지난밤 내린 빗물에 젖은 녹사화가 미끄러질 뻔하였던 것이다. 시립(侍立)해 있던 동궁전의 상궁나인들이 놀라 부축하려 하자, 혼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괴로웠다. 죽을 만큼 괴로웠다. 아비의 비난에도 아무것도 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어느덧 장성해 대장부가 된 세자는 그 인품이나 능력으로 보아 부족한 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란을 잠재운 공로를 생각한다면 칭송받아 마땅한 인재였다. 그러나 왕은 세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계속된 냉대에 세자의 입지는 날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비에게 거부당하고도, 항의 한 번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던 혼이 동궁 처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오라버니!”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혼은 반사적으로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색동 당의를 차려입은 어린아이가 달려와 혼의 다리를 감싸 안으며 매달렸다.
“연리로구나.”
올해로 여섯 살이 된,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국혼을 올리자마자 회임했던 중전이 낳은 첫 아이였다. 다들 대군일 것이라 짐작했던. 하나 다행히도 여아였고, 덕분에 단숨에라도 내쳐질 뻔했던 자신은 간신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혼은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꼭 매달린 여동생을 품에 안아 들었다.
“아침부터 여긴 어인 일이냐?”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서요!”
새 중전의 소생, 연리는 정명(貞明)이라는 봉호를 받은 공주였다. 대군을 기대하던 아비였으나, 늘그막에 얻은 적녀라 그런지 제법 총애하는 눈치였다. 마지못해 문안을 간 중궁전에서는 아비가 손수 이름자를 지은 공주라고 혼에게 으스대기까지 했다.
때문에 혼은 새 여동생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정명공주는 나날이 궁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역대 어느 공주보다도 훨씬 총명하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다 혼은 작년에 우연히 들른 후원에서 공주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공주를 모시고 나온 상궁이 세자저하시라 귀띔하자, 공주는 깜찍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연리라고 하옵니다, 세자 오라버니!”

첫 만남에서 자신을 봉호가 아닌 이름으로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세자저하가 아닌 오라버니라고 부른 아이였다. 당황한 혼에게, 연리는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이 꽃을 아십니까? 소녀가 제일 좋아하는 꽃입니다. 오라버니께선 어떤 꽃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아무 말 못 하고 연리를 바라보기만 하는 혼이었으나, 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그러다 처음 뵌 오라버니이니 선물을 하겠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꽃 수 송이를 꺾어 건네기까지 하였다. 얼떨결에 꽃을 받아 든 혼을 보고 연리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어떠한 그늘도 없는,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밝은 웃음이었다.
연리는 아비를 쏙 빼닮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어미인 중전은 동그랗고 평범한 눈매였는데, 그 여식인 연리는 아비인 왕을 닮아 우아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궁인들은 역시 정궁 소생이라 왕의 고귀함을 빼닮은 것이라고 말하고들 했다. 차이점이라면, 신경질적이게 치켜 올라간 왕과는 달리 연리의 눈매는 날렵하지만 부드럽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보는 아비의 눈에서는 다정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날, 혼은 연리에게서 따스한 아비의 눈을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그늘 없이 밝게 웃는 연리의 고운 눈매는 혼이 수없이 그리워했던 아비의 그것이었다.
그 후 혼은 전보다 자주 후원으로 행차했다. 연리가 항시 후원에 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의 항상 나들이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혼과 연리는 함께 후원을 거닐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모두에게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자란 연리는 천성이 명랑하고 밝은 공주였고, 그런 연리와 함께할 때면 혼은 아비에게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 둘 곳 없었던 궁에서 그는 연리를 통해 위로와 생기를 얻었다. 순수하고 맑은 연리와 대화를 할 때면, 잠시나마 복잡한 정쟁(政爭)에서 멀어지는 듯해 숨통이 트였다.
연리는 자신을 총애하기는 하나, 항상 눈치를 보게 되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성정의 아비와는 다른 혼의 다정함이 좋았다. 오라비는 언제나 제 말을 조용히 들어주었고 따스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봐 주었다. 직접 서책을 구해 와 이를 자상하게 하나하나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손수 붓을 잡고 붓글씨 연습을 도와주기도 했다. 연리는 혼에게서 언제나 자신을 귀애하여 주는 부정을 느꼈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연리는 마침내 동궁전에까지 발걸음 하게 되었다. 동궁전 상궁나인들은 처음엔 연리를 경계하였으나, 연리가 찾아온 날이면 눈에 띄게 밝아지는 혼을 보고는 점차 마음을 열었다. 이처럼 혼과 연리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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