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란 형식 속에서 운명적인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비평가의 심오한 체험이란 곧 형식이 간접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자체 속에 감추고 있는 영혼의 내용이다. ― 루카치, 『영혼과 형식』
개인적으로, 나에게 문학이란, 운명적인 것, 책 장 속에 감추어진 영혼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태도를 아마 ‘매혹’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서가에 길게 늘어선 책의 제목을 바라보면서 어떤 설렘과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면, 아마 나를 지나친 감상주의자, 문학적 교양주의자라고 타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이런 설렘에 대한 향수가 문학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문학을 공부하고 비평가가 된 이후에, 이런 매혹의 즐거움은 어떤 까닭인지 많이 줄어들었다. 책을 읽고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게 되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이렇게 저렇게 분석하고 평하게 되면서, 매혹당하지 않는 방법을 나는 스스로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글쓰기에 대한 스스로의 자의식과 자기 검열에 아직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어쩌면 아무 영혼에게나 내 마음을 함부로 주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같은 것이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10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처음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음을 느낀다. 두꺼운 책표지에 덮여 있던 그 종이들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을 통해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깨달은 것은, 운명을, 영혼을 직시하는 법, 그것이, 곧 비평적 글쓰기라는 사실이다. 매혹의 근원은 단순한 책의 촉감과 향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진 높은 정신과 운명, 그리고 영혼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혹자는 이런 나에게 문학이라는 ‘환각’에 취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환각의 체험’이 곧 문학의 본질이고 비평가의 ‘심오한 체험’이라고 믿는다. 언어는, 형식은 환각의 집이다. 존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래서 향기로만 맴도는 높은 정신과 숭고한 영혼이, 환각의 집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그 환각에 매혹될 것이다.
무언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된 사람. 특히, 그것이 아름다움일 때, 그런 사람을 흔히 ‘매혹당한 자’라고 말한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는 점에서 매혹된 글쓰기는 언제나 환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타자의 심오한 체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환각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평적 글쓰기가 어려운 것은 그런 타자의 환각 속에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각을 직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아직도 ‘길’ 위에 서 있다. 환각 속에서, 형식 속에 감추어진 운명과 영혼을 바라보는 ‘심오한 체험’을 터득할 때까지, 아마도 나는 이 길 위에 서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모두 90년대 이후의 시에 관한 것이다. 1부에서는 90년대 이후 시의 문학적 지형과 핵심적인 징후에 관한 글을 모았고, 2부는 90년 후반에 나타난 시의 다양한 전략과 시적 진정성의 척도에 관해서 다루었다. 3부는 미적 근대성과 90년대 시의 상관성을, 4부는 90년대 이후 시에 나타난 시적 예언과 구원의 기능에 관해서, 5부에서는 시의 존재성과 시정신에 관한 단상을 중심으로 쓴 글을 각각 따로 묶었다. 90년대는 시의 근대적인 장르 규범과 가치 기준이 무너지면서, 가치 평가의 ‘공준(公準)’이 무너진 시대이다. 가치의 혼란 속에서, 시는 스스로의 ‘몸 바꾸기’를 통해서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점에서 90년대 시는 치열한 시적 전략과 시정신의 쟁투가 벌어진 시대였다. 시의 죽음이 심심찮게 거론되었고, 전략적인 살아남기와 정신의 항변, 몸 바꾸기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미학이 산출되었다.
이 평론집에 실린 글들은 이러한 90년대 이후 시를 중심으로 문학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탐방기이고 동시에 미학적인 모험담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는 여기 실린 글들을 쓰는 동안, 다소의 이론적인 모험을 감행했고, 현장감에 기대어 예언적인 전망을 내리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이곳에 실린 ‘시적 지형도’는 이런 비평적 모험의 결과물이다. 엄밀한 이론적 정합성보다는 시기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일, ‘동시대적인 감수성과 감각’에 더 많이 의존했음을 밝혀둔다. 물론 각각의 글에서 최대한의 면밀한 분석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적 생산의 현장은 언제나 이론을 앞서가는 만큼, 비평적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시문학이 한 번도 문단의 중심에 위치했던 적은 없다. 그만큼 시는 변방의 장르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지난 10년 동안만큼 시문학을 둘러싼 ‘미학적 논쟁’과 시인들의 치열한 ‘시정신’이 돋보인 적도 일찍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이 책의 절반은 이런 불우하지만 ‘불온한 자존심’으로 시정신을 불태운 시인들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다. 이번 평론집에는 90년대 시인론과 작품론을 싣지 못했다. 평론집의 전체적인 틀이 90년대 시의 전반적인 지형과 징후, 그리고 가능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형태로 짜여진 만큼, 개별 시인론과 작품론을 책으로 묶는 일은 다음을 기약하겠다.
오랫동안 안고 끙끙거리던 원고를 드디어 책으로 낸다. 그래서, 더욱 커진 부끄러움은 모두 나의 몫이다. 첫 평론집을 묶고 나니 감사드려야 할 많은 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처음으로 나를 글쓰기의 길로 인도하고 또 학문의 길을 열어주신, 그래서 나에게는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홍기삼 선생님께 부끄럽지만 이 책을 바친다.그리고 늘 옆에서 나를 지켜준 가족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2003년 1월 김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