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세상이다. 몇 년 전부터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이 대세가 되었다. 인문 분야 학과들을 없애거나 하나로 통합하는 내용인데, 그 이유는 취업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문과대학에서 철학과는 거의 없어졌고, 불문학과·독문학과·국문학과 등은 통폐합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대학을 비롯해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인문과 교양은 사라지고 실용과 취업만 남았다. 대학의 인문적 교양과목은 취업용 실용과목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실용이 대세라서 학생들은 문학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어 공부는 운문의 시를 읊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상거래에 관련된 구문을 가르치는 실용영어가 되었다. 수능의 영어시험에도 이런 문제가 출제된다. 문학이나 철학은 대학의 교양과목에서 사라진 경우가 많고, 있어도 내용은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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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 사라진 삶과 세상이 끔찍할 뿐이다. 나는 예술작품을 읽는 것은 곧 허구보다 더 큰 세상, 타협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윤리와의 만남이라고 배웠다. 작품을 읽고 난 후, 해석의 보충은 작품에 기여하는 독자의 몫이라고 알고 있다. 저작과 독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교양 공동체가 형성된다. 오늘날 이런 가상의 공동체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 pp.64-65
연극의 매력은 오랫동안 과거의 사건을 항상 현재시제로 재현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연극이 과거의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늘 새롭게 기억하고 기억을 재생산하는 장르의 예술이기 때문일 터이다. 연극은 기억의 변증법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고리가 하나씩 새롭게 형성될 때마다 삶의 사슬은 과거로 옮겨간다. 연극에서 기억의 저장장치는 극장이고, 희곡에서 기억의 저장장치는 글을 비롯하여 인물들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극적 장치들은 모두 기억의 공간을 생성한다.
희곡에 등장하는 문자로서의 인물들을 살아 있는 인물로 만드는 기제는 무엇보다도 기억이다. 표면적으로는 기억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들의 모든 상처를 무의식 속으로 억제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감각기관에 의해 흡수된 경험이 도장을 찍는 것처럼 기억 속에 이미지eikon, 즉 상을 남긴다”. 이처럼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상像, 즉 메타포와 같은 기억은 등장인물들을 행동하게 하는 기제가 된다. --- pp. 131-132
연극은 기억 공간이 낳은 것이되 동시에 기억을 위한 공간을 낳기도 한다. 그러니까 연극 앞에 허구·몽상의 공간이 있고, 연극 뒤에 실제와 미래의 공간이 있다. 이 모든 공간을 아우르는 것은 연극 그자체이기보다는, 연극 속 인물들이 지닌 기억의 밑바닥과 같은 삶이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 같은 공간을 오가는 것은 삶의 실체이다. 연극은 삶과 견줄 수 없다. 연극은 삶의 그늘과 같은 공간에서 삶을 위하여 봉사할 뿐이다. 공간은 연극을 창출하는 유전자일 뿐, 삶을 결정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공간은 연극의 공간에서 재구성된다. 그러나 연극 속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기억 공간은 삶의 공간을 초월하기도 한다. --- p.198
연극에서 허구의 가치는 그것이 표상하는 일상적인 삶이 상상력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때 가장 커진다. 그런데 그 허구를 창조해내는 개개인의 힘이 무력화할 때 연극은 그 무력함을 고발하고 관찰하는 것으로 허구의 창조를 대신한다. 허구는 실제로 대신되거나 허구의 허구인 이미지로 치환된다. 이미지는 리얼리티의 구조가 아니라 그것이 구조화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허구에 대한 긴장을 실제에 대한 긴장으로 바꾸어놓는다.
드라마가 해체되고 이미지로 대체되는 경향은 언어와 이성적 구조의 정합성에 대한 의문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18세기 시민사회가 성립된 이래 신성시되어오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특히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남은 것은 인간의 실존뿐이었으며 그것을 보증해주는 것은 상처받고 견뎌낸 인간의 몸과 거기에 담긴 집단적 기억이었다. 타데우즈 칸토르, 로버트 윌슨, 하이너 뮐러, 피나 바우쉬, 마티아스 랑고프 등의 연극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연극은 분절언어로 구축되는 드라마의 구조보다는 신체에 담긴 상처를 기억하거나 꿈과 악몽을 분석하거나 인간이 실존하는 풍경을 묘사했다. --- p.222
시대가 불안해 보일수록, 기국서가 쓰고 보여주었던 작품들이 되살아난다. 그의 작품들은 자신이 세상보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다는 자각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삶의 순정과 이어지는 예술의 자각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연극에서 그의 존재보다 주목받은 것은 그가 던지는 연극의 메시지였다. 그는 독특한 글쓰기와 연출을 함께 한 연극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악동처럼, 머물지 못하고 배회하는 떠돌이처럼, 자신이 만든 가치만을 긍정하면서 사는 무정부주의자처럼 연극했다. 연극이 더는 세상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지금, 세상에 대한 불만이 불만 같지 않고, 거부가 거부 같지 않은 오늘날, 지난 시절 그가 했던 연극작업은 새롭게 조망될 필요가 있다. 일상의 삶에 초연한 기국서라는 연출가와 난장 같은 그의 작품과 바닥이 흐려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이 한통속으로 혼란스럽고, 그것들의 원인이 동질의 것일 때, 우리에게 그의 연극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의 연출은 어두운 세상 나들이이고, 삶 전체를 가로질러가는 두려움이다. --- p.321
관객이 있어야 연극이 존재한다는 면에서 관객은 연극의 공모자, 연극은 관객의 공모자이다. 공모共謀(conivere/conniver)란 함께co 눈감는nivere 것을 뜻한다. 그것은 연극이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그 기대에 어긋나기 이전에 생성되는 믿음과 같은 합의이다. 그리고 관객이 연극을, 연극이 관객을 미리 생각했고 느꼈다는 암묵적인 합의의 신호이다. 공모란 가시적이며 현실적 존재인 관객과 비가시적 꿈인 공연의 만남이며 융합이다. 공연의 힘이 대상인 현실을 변형하는 것이라면, 관객의 힘은 공연을 봄으로써 현실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공모가 욕망이 낳는 믿음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공연을 향한 관객의 믿음은 연극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다는 욕망에 근거한다. 연극을 생산하는 작가의 믿음은 소유할 수 없는 현실세계를 무대 위에 달리 세우려는 욕망에 근거한다. 관객이 지닌 공모의 힘은 곧 연극 생산자가 지닌 꿈의 또 다른 이름인 상상력과 등가이다. 관객의 욕망은 부재하는 대상을 꿈꾸고, 작가의 상상력은 무대 위에 그 대상을 그려내며, 공모는 그 대상에 실체성을 부여한다. --- p.406
한국의 현대 연극은 앞으로만 가는 초고속 산업사회의 자취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중심의, 중심의 한복판으로 이어지는 직선을 긋고 그 위에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나아갈수록 큰, 더 큰 연극의 땅과 좋은, 더 좋은 연극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순간 연극은 멈춘다.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연극은 아주 작고 작은 것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 결과 연극의 수명은 줄어들고, 작가들은 상실된 기억을 되짚어보려는 신경강박증에 빠지고 만다.
‘앞으로’라는 방향과 빠른 속도주의야말로 연극과 작가들이 경계해야 할 위험이다.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시선을 돌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공연과 작가, 그리고 비평을 포함해서 지금 한국의 현대 연극은 중증의 기억상실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보이는 것은 뒤가 아니라 앞뿐이다. 그러나 앞은 멈추어 있지 않고 나아갈 뿐이다. 의지와 관계없이 몸은 휩쓸려 나아간다. --- p.448
미디어의 시대인 오늘날, 연극은 전율하고 있다. 연극은 세상이 너무나 많이, 그것도 빨리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다. 정보화 사회, 테크놀로지 시대의 미디어가 삶의 방식, 나아가 인간의 존재방식을 모두 바꿔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연극은 제 모습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 연극과 미디어의 관계는 곧 연극과 자본주의, 연극과 첨단 테크놀로지 같은 대립의 문제들을 낳는다. 그것은 이어서 연극과 현실, 연극과 가상현실이라는 문제로 확대된다. 따라서 연극과 오늘날 미디어와의 관계는 미디어만의 문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연극의 존재론적 문제로 귀결된다.
미디어가 연극을 변모시키고 해체하는 이유는, 미디어가 연극의 현실을 더욱 가상성의 세계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연극이란 현실 이전에 어떤 변모를 뜻한다. 미디어가 연극을 변모시키는 문제는 연극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이전의, 말하자면 연극의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문제일 듯하다. 미디어와 연극의 관계는 곧 연극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연극 이전의 문제일 듯하다. 연극을 아무도 모르는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다시 연극의 원점으로 이끄는 기획일 듯하다. 그렇게 해서 연극의 새로운 창조적 변형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