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마흔 살이 될 때까지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늦잠꾸러기인 아들을 깨우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호야 인나, 그만 인나.”
아침마다 들어야 했던 아버지의 그 지겨웠던 소리를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자꾸만 잠들려 하는 게으른 날 깨우는 내 영혼의 소리와도 같으므로….
… 어느 날인가 <무덤에서 나온 신랑>이라는 괴기 영화를 보고 겁이 나 컴컴한 뚝섬의 배추밭을 뛰어오다가 그만 거름통에 빠져 버렸던 기억도 있다. 어른들께 극장 값을 얻지 못한 날이면 그냥 털레털레 뚝도극장까지 걸어가 극장 앞 공터에 쭈그리고 앉아 낡은 스피커를 통해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만을 듣고 영화감상을 대신하곤 하였다. … p123
… 아버지가 늘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던 낡은 수첩을 뒤지게 되었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 모든 주요 연기자와 스태프의 전화번호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 아버지는 내가 없는 동안 내게 전화를 걸어온 그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내가 귀찮아 얘기 하지 않은 일들을 하나하나 물어 궁금중을 풀었으며 … p47
… 극장 요금이 천500원이었던 그때, 이 작품이 제작 예산은 제작자가 일방적으로 정한 8천만원이었는데 제작비가 3천만원을 초과하자 충무로에서는‘벤허 찍냐?’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 스태프들이 공기밥을 추가로 먹으면 제작부장이 눈총을 줄 정도로 가난하고 열악했던 나의 데뷔 시절, 그때 우리는 돈과 기술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온몸과 열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p80
… 그는 한 편의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다른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옷차림도, 성욕도, 세수도, 고린내 나는 양말도 관심 밖의 일이다. 그저 먹고, 그리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기에 걸터앉아 똥을 싼다. 저렇게 정성을 들이는 놈이라면 하느님도 감동할 것이다. ‘작가 최인호가 본 배창호’중에서 p255
배창호의 영화 인생
… 디지털 세대의 눈은 상당히 밝아져서 연출상의 실수나 틀린 연결, 잘못 등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카메라의 그림자를 찾아내고 … 이들 디지털 세대 관객들의 특징은 자기가 바라보고 목격한 세계만 믿는 리얼리스트란 사실이다. … 영화적으로 재창조된 캐릭터나 현실세계의 모습을 몹시 낯설어하거나 잘못된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 이 디지털 세대의 관객들에게는 상상력이 결여되어 버렸다. p24
…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가 바로 쉼표가 없는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쉴새없는 자극과 긴장과 위기가 계속된다. … 자극의 맛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더한 자극적 요소를 던져 주느냐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p118~119
… 영화는 정서를 위한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단지 재미를 위해서만 본다는 것은 바로 맛을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심심풀이 팝콘’이나 ‘땅콩’ 같은 스낵을 통해서는 결코 우리의 영양을 섭취할 수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심심풀이 팝콘류의 영화만으로는 우리의 정서를 살찌울 수 없기 때문이다. p211>
… 영화의 종류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길몽 같은 영화, 개꿈 같은 영화, 그리고 악몽 같은 영화다. 길몽과 같은 영화는 맑고 깊은 샘물에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혼의 거울이며, 개꿈과 같은 영화는 단지 현상 세계에 집착하거나 아니면 현실화 될 수 없는 관념과 상상만의 세계다. 악몽과 같은 영화는 인간의 지나친 악성만을 강조한다거나 저질 포르노 같은 … p143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 <러브스토리> 이후 우리 영화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감독 중심에서 제작자 중심으로 영화 제작 시스템이 바뀌면서 대다수 감독의 지위는 주문 생산의 기능자처럼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신인 감독들이 양산되었다. 영국의 작가 ‘서머셋 몸’은 문학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서밍 업>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한두 편의 괜찮은 소설은 쓸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문학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한두 편의 작품을 남기고 있는 소수의 작가들이다.”영화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 p16
…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나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 수단인 영화라는 매체의 중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듯싶다. 그 표현의 대상인 ‘인생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 만드는 사람의 ‘인생을 보는 눈’이 넓고 깊을수록 그 공감의 폭 또한 넓고 깊어진다. p183
… 며칠 전에 새로운 연출부 막내가 들어왔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자신감과 포부가 대단한 준수한 용모의 청년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 되기를 걱정하지 말고 좋은 감독 되기를 걱정해라.”… p101
감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나는 왜 영화를 하는 것인가?’관객 누구에게나 사랑의 마음이 있으며, 잃어가는 그 사랑의 마음을 영화가 조금이라도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영화를 통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먼저 닦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 좋아하는 술도 무책임한 말을 많이 내뱉게 하므로 마시지 않기 시작했다. 내 탁한 마음을 비주지 않고서는 내가 창조하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거울처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p 63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고정관념의 때와 아집의 얼룩이 없을수록 그가 영화를 통해 비추어주는 이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들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p 176
나는 왜 영화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