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 넌 언젠가 문달스달렌으로 가던 중에 ‘초자연적 현상’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어. 예언이나 투시력, 텔레파시도 믿지 않는다고 했어. 넌 내가 그런 현상의 여러 가지 실제 사례를 얘기하자마자 그렇게 말했지. 스스로의 눈가리개를 벗어 던지고 그런 현상을 직시한다는 건 너한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넌 심지어 네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도 누가 너한테 보낸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생각해낸 거라고 굳게 믿고 있을 거야.
그런 사람은 많아, 스테인. 요즘엔 정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에는 절대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눈 뜬 장님이 많아. 영적 빈곤이 만연한 시대라고나 할까.
하지만 난…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우리가 삼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 바로 그 호텔 베란다에서 다시 만난 걸, 난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가 없어. 이런 일의 이면에는 우리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믿어. 그게 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내게 묻지 마. 그건 나도 모르니까. 정말 몰라. 하지만 그게 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눈을 감아버리고 모른 척하는 것과는 달라. 오이디푸스도 자기 운명에 대한 예언을 들었지만, 그게 어떤 형태로 자기한테 닥칠지는 전혀 몰랐잖아. 사실 오이디푸스는 자기 운명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눈 뜬 장님이 돼버리고 말았지.--- p.27
그 얘기로 다시 돌아왔군. 그래,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우연’이라는 말은 통계적으로 매우 낮은 확률을 의미한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난 언젠가 주사위로 통계적인 계산을 해본 적이 있어. 주사위를 던졌을 때 6이 연속으로 열두 번 나올 확률은 얼마나 될지 직접 계산해봤지. 결과를 말하자면 주사위의 6이 열두 번 연속으로 나올 확률은 수십억 분의 일이야. 그렇다면 정말 주사위를 수십억 번이나 던져야 열두 번 연속으로 6이라는 숫자를 얻을 수 있을까? 그건 그렇지 않아. 지구에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들 중에는 단 한 번의 시도로 열두 번 연속 6을 얻은 사람도 없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우린 이 한 번의 시도로 얻은 결과를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확률에 어긋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어쩌면 이건 우주적 차원의 일로 해석해야 할지도 몰라. 물론 이렇게 말하면 비웃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 어쨌든, 통계적으로 봤을 때 주사위의 6이라는 숫자를 열두 번 연속으로 얻는 일은 적어도 수천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사위만 던져야 가능한 일이야. 물론, 단 몇 초 만에 이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정말 재미있지 않아?
어쨌든 그 호텔에서 갑자기 너하고 마주쳤던 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어. 널 보는 순간, 난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랐지. 난 그 일을 주저 없이 행운이나 행복한 우연이라고 부를 거야. 초현실적인 사건은 절대 아니니까. --- p.30
물론, 나도 마그리트 그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 그림은 전에 우리 침실 벽에도 걸려 있었잖아. 방금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봤어. 제목이 ‘피레네의 성(Le Chateau des Pyrenees)’이라고 나와 있네. 우린 이 작품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말했지. 인터넷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 당시에 우린 불가지론자였어.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구시대적 사고, 즉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것 말고도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문제를 두고 토론도 자주 했지. 하지만 우린 어떤 형태의 전지전능한 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의견 일치를 봤던 것으로 기억해. 그리고 우린 항상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경탄했지.--- p. 46
하지만 네가 꿨던 꿈은 거의 악몽에 가까운, 두려운 것이 아니었어? 네가 우주에서 유일한 의식으로 존재했던 꿈은 사실 네가 그 반대의 상황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넌 꿈속에서 네가 놓여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 원상태로 복원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잖아. 스테인, 이 지구에는 너 혼자만 존재하지 않잖아. 우주에는 수많은 영혼이 존재하지. 정확히 얼마나 많은 영혼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 수가 엄청나다는 것만은 분명해. 한여름 바다를 비추는 끝없는 햇살처럼 말이야.--- p.152
스테인, 네게는 수호신이 있었어. 난 지금 이 점을 상기시키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믿어. 그 수호신은 네가 집에 돌아오기 반시간 전쯤에 이미 대문을 열고 들어왔어. 처음엔 난 그게 너라고 확신했어. 그래서 하던 일을 제쳐두고 현관까지 달려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어떤 때는 네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느낌에 얼른 침실로 들어가 유혹하는 듯한 자세로 널 기다릴 때도 있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일종의 사전 예고라는걸 알게 됐지. 강렬한 느낌을 통해 곧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해 알 수 있는 그런 상태 말이야. 사실, 이 느낌들이 실용적일 때도 없지 않았어. 네가 곧 대문을 열고 들어설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상을 차리거나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널 유혹하기 위해 단장을 하기도 했어. 넌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이렇게 미리 계획한 저녁 이벤트에 무릎을 꿇었지. 기억해? 어느 겨울날 저녁, 넌 침실을 가득 메운 양초들에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나를 보며 사랑의 욕조 같다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지. 스테인, 내가 지금 이런 얘기들을 쓰는 이유는, 네가 사이비 또는 신비주의적 일로만 믿고 있는 내 능력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란다. 이런 것들은 내게 있어서 현실이나 다름없어. 적어도 너와 알고 지냈던 동안은 말이야.--- p.171
솔룬, 난 그렇게 비상식적이고 신비로운 걸 믿기엔 너무도 미미한 존재야. 물론 네 말이 사실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이 세상의 의식은 바로 우리야.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전 우주를 통틀어 인간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신비로운 창조물이라는 사실뿐이야. 그렇다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운명 말고 다른 걸 꿈꾼다고 해도 그리 어리석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어쨌든 네 관점은 비록 이중적이긴 하지만, 현실적 존재로서의 너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듣기 좋았어. 만약 네가 과거에 우리가 함께 나눴던 사랑의 행위마저도 우리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였기에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했다면 난 기분이 어땠을까? 실제로 현세의 감각적, 육체적 행위를 모두 부인하는 종교적 관점도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어. 그런 관점에선 인간이 진정으로 현실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지.
--- p. 24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