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간 깜짝 놀라며 멈칫했다. 그 어머니가 하는 인사말은 들리지 않고 누군가 내 손을 잡은 감각만이 내 가슴속에 ‘팍!’ 하고 전달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고맙다고 내 손을 잡는데 마치 딱딱한 장작 껍질이 닿는 듯했다. 너무 거칠었다. 주름진 곳에 새까맣게 탄 피부가 퍼져 있고, 그 사이사이 주름들이 흰 강물같이 흘러내리듯 패어져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 어머니가 바닷가 조그만 밭에서 돈도 안 되는 양파를 심어 고생스럽게 키워서 그걸 팔아가지고 지금 저 아들의 머리에 금실로 만든 학사모를 씌웠겠구나’ ---「어머니의 손」중에서
나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졌다. 부끄러움이 온 얼굴에 솟아올랐다. 나는 어머니가 무슨 반찬을 도시락에 넣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친구가 감자조림 얘기를 하자 갑자기 우리 집 형편이 생각이 났다. 그러자 분노에 가까운 부끄러움이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었다. 친구에게 “너는 옆자리 친구의 도시락 반찬을 15일간이나 세고 앉았냐” 하며 부끄러움을 감췄지만 가슴 속에 박힌 모멸감과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날 집에 가서 도시락을 내놓으며 슬며시 “엄마, 다른 반찬도 좀 해줘” 하고 얘기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부엌에 가서 도시락을 보았다. 살짝 열어보니 반찬이 또 감자조림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시락을 잊은 척 놓고 학교로 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배고픔을 참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공차고 놀았다. ---「감자조림 도시락」중에서
할머니는 쑥이 돋아날 때면 삼촌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혼자 중학교에 다니려고 고향집을 떠나갈 때의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삼촌에게 쑥 한 줌을 주머니에 넣어서 가방에 묻어두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쑥 생각만 해라” 하고 타일러주었다고 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향기를 지니고 피어난 쑥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겨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고 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쑥처럼」중에서
나는 그를 보내고 정말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책 읽는 것이 제일 힘들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답을 내렸다. 책 읽는 것은 힘든 것이 아니었다. 힘든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였다. 책 읽기는 정직해서 내가 정성들여 읽으면 그 정성만큼 나에게 그 내용을 알게 하였고 내가 게으르게 읽으면 책은 나에게 느리고 애매하게 그 의미를 깨우치게 해주었다. 모두 내 의지와 감정에 따라 달라졌다.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나 자신만의 의지나 감정으로 맺어지지 않았다. 조그마한 부주의로 유리그릇이 깨어지듯이 산산조각이 날 때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요?」중에서
나가보니 무릎까지 눈이 쌓여있었고 하늘에서는 눈이 계속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 집 저 집 어머니를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지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동네에서 어머니와 제일 친한 아주머니가 아랫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 집에 한 번만 더 다녀오기로 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전봇대가 있고 그 전봇대 옆에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눈사람 곁을 스쳐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동규야 하고 불렀다. 보니까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눈을 철철 맞으며 머리에는 보자기를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