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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602g | 152*224*30mm
ISBN13 9791185393261
ISBN10 118539326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저에게 생명을 주시고서 자잘한 일상사를 어떻게 모두 빼앗아, 죽음 같은 상태로 빠져들게 할 수 있나요? 제 영혼은 어디에서 은총을 받나요? 제 가슴은 어디에서 감정을 품나요? 여기 황량한 황무지에다, 꽃을 활짝 피워서 정원으로 가꾸어야 할 여기에다, 아, 아버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셨나요, 도대체 무슨 짓을!”
루이사가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내려치며 계속 말했다.
“여기에 꽃을 활짝 피운 적이 있다면 그 기억 하나로 저는 생활 자체가 진공상태로 모두 빠져드는 걸 막을 수 있었을 거예요. 이런 말까지 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아버지, 우리가 지난번에 이 방에서 나눈 대화를 기억하세요?”
아버지는 지금 이런 말을 들을 준비가 전혀 안 된 터라 몹시 어렵게 대답했다.
“그래, 루이사.”
“당시에 아버지가 저를 조금만 도와주셨다면 지금 하는 말을 당시에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아버지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나에게 가르치지 못한 건 아버지 역시 못 배운 거니까요. 하지만 아! 아버지가 오래전에 멈추기만 했어도, 아예 나를 내버려두기만 했어도,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행복하게 살았을 거예요!”
온갖 관심을 기울이며 키운 딸에게 이런 말까지 들으니, 아버지는 머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앓는 소리를 절로 커다랗게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여기에서 대화를 나눌 때 ?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을 모두 물리치려고 힘껏 싸우는 게 어릴 때부터 제가 한 일이니 ? 제가 힘껏 싸우면서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았더라면, 다양한 감수성과 애정이, 장점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약점이, 인간이 지금까지 내린 모든 판단을 거부하고 창조주가 허용하신 이상의 산술 판단을 거부하는 약점이 제 가슴에서 꿈틀거린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았더라면…… 그래도 세상 무엇보다 증오하는 사람을 저에게 남편으로 맺어주시겠어요?”
“아니다. 아니다. 가엾은 우리 딸.”
“제가 서리와 마름병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리며 모든 감각을 잃고 망가지도록 하시겠어요?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데, 세상을 좀 더 황량하게 만들 뿐인데, 제 인생에서 정신적인 영역을, 제 믿음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과 화려한 여름을, 주변에 널린 더럽고 나쁜 것에서 제가 피신할 피난처를, 제가 좀 더 겸손하게 주변 사람을 신뢰하며 살아가고 그래서 나로 인해 주변 사람 역시 조금이라도 좋아지길 바라며 살아가도록 공부하는 과정을 저에게서 빼앗으시겠어요?”
“아, 아니다, 아니야. 아니야, 루이사.”
“그래요, 아버지, 제가 눈이 완전히 멀었다면, 그래서 손으로 더듬으며 나아가야 한다면, 하지만 사물 표면과 모양새를 만지며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지금 이렇게 눈을 달고 사는 것보다 모든 점에서 백만 배는 현명하고 행복하고 사랑하고 만족하며 인간적으로 더욱 순결하게 살았을 거예요. 제가 애초에 여기에 온 까닭을 이제부터 말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아버지가 팔로 딸을 부축하려고 움직였다. 그러자 딸도 일어나, 두 사람은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딸이 한 손을 아버지 어깨에 올려놓고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저는 단 한 번도 충족시킨 적이 없는 굶주림과 갈증하고 매 순간 싸우며, 줄자와 숫자와 사물에 대한 정의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하고 매 순간 싸우며 지금까지 살았어요.”
“네가 그렇게 힘든 줄 조금도 몰랐구나, 아가.”
“아버지, 저는 제가 힘든 걸 언제나 알았어요. 끝없이 싸우는 가운데 저는 제 몸속에서 천사를 거부하고 파괴하며 악마로 만들었어요. 제가 배운 내용은 제가 모르는 내용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고 깔보고 경멸하도록 만들었어요. 제가 배운 황량한 지식은 인생이란 어차피 끝난다고, 굳이 힘들여서 노력할 정도로 중요한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어요.”
“이렇게 젊은데, 루이사!”
아버지가 한탄했다. 불쌍히 여기는 어투다.
“그래요, 아주 젊지요. 바로 이런 상태에서 ? 제 마음이 평소에 무감각하다는 상태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이나 편견 없이,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는 건데 ? 아버지는 남편을 권하고 저는 받아들였어요. 지금까지 아버지나 남편 앞에서 제가 남편을 사랑하는 척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제가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아버지도 알고 남편도 알아요. 물론 처음부터 관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톰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무모한 환상이란 사실이 서서히 드러났어요. 그동안 저는 톰만 바라보며 살았어요. 톰이 그렇게 된 건 제가 너무 가련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톰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아버지가 훨씬 너그럽게 생각하도록 도울 수도 있겠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바로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버지. 제 인생에 새로운 사람이 우연히 끼어들었어요. 제가 예전에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세상 물정에 밝고, 명랑하고, 세련하고, 느긋한 사람. 허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 모든 걸 얕잡아보고,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약간 걱정하는 사람. 처음 만나고 얼마 안 돼서, 그 깊이와 방식은 모르겠지만, 저를 이해하고 제 생각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 저보다 나쁜 점은 찾을 수 없었어요. 우리 둘은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았어요. 저에게 유일하게 의심스러운 건, 세상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 정말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관심을 쏟을 수 있는가였어요.”
“너에게, 루이사!”
아버지는 움켜잡은 딸을 본능적으로 놓을 것만 같았다, 딸에게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걸 못 느꼈더라면,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눈에서 매섭게 일어나는 불꽃을 못 보았더라면.
“그 사람이 자신을 믿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어요. 제가 그 사람을 어떻게 믿기 시작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결국 저는 그 사람을 믿었으니까요, 아버지. 제 결혼에 대해서 아버지가 지금에서야 파악한 내용 역시 그 사람은 단번에 파악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얼굴이 잿더미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딸을 두 팔로 꼭 껴안았다.
“저는 그 이상 나쁜 짓은 안 했어요. 아버지 명예를 더럽히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지금도 사랑하는지 물으신다면, 그런 것 같다고 솔직하게 대답하겠어요. 아아, 모르겠어요.”
딸은 아버지 어깨에서 갑자기 두 손을 떼어내 자기 옆구리에 댔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서, 평소와 다른 얼굴에서, 자신이 할 말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결심하곤 가슴을 똑바로 편 모습에서, 오랫동안 억누르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오늘 밤,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 그 사람이 찾아와서 저를 사랑한다고 선언했어요. 지금 그 사람은 저를 기다리고, 저는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이 여기에 찾아오는 것밖에 없었어요. 지금 저는 이런 상황을 후회하는지도 모르고, 창피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고, 제 자존심을 깔아뭉갰는지도 몰라요. 제가 아는 건, 아버지 철학과 가르침은 저를 구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저를 이런 상태로 만든 사람은 바로 아버지예요. 그러니 이제 다른 방법으로 저를 구해주세요!”
아버지는 바닥으로 쓰러지는 딸을 재빨리 붙잡고, 딸은 끔찍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저를 잡으면 그냥 죽어버리겠어요! 바닥에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세요!”
그래서 아버지는 딸이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품었던 자부심이자 자신이 세운 시스템의 결정체가 정신을 잃은 채 발밑에 쓰러진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통에 시달리다가도 가끔 정신이 들 때마다 별이 저 위에서 비추는 걸 깨닫고, 우리 구세주가 계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할 별이라고 생각했소. 바로 저 별이 그 별이라고 생각했다오!”
사람들은 스티븐을 조심스레 들고서 들판을 따라가고 오솔길을 내려가고 광활한 풍경을 지났다. 레이첼은 스티븐 손을 안 놓았다. 속삭이는 소리조차 없어 구슬픈 침묵만 가득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행렬 자체도 장례 행렬로 변했다. 별은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을 찾도록 빛을 비추고, 망자는 겸손과 슬픔과 용서를 통해서 구세주 품에 안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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