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두의 배아주머니 반대편 끝은 색이나 밀도가 주변부와는 다른 조각 하나가 끼워져 있는 것 같은 형태이다.
로스팅 과정에서 이 조직간의 경계(검정 선 부위) 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파핑과 구분되는 “크랙” 이다.
체리에 이미 존재하는 금이 열에 서서히 벌어져 더 잘 보이게 될 뿐이므로 실체와 부합하는 표현은 “crack widening”이다. --- p.7
생두를 볶으면 한쪽에는 어김없이 반점, 그리고 반대편은 크랙이 만들어진다. 반점은 배아 줄기의 끝 부분이 로스팅 중에 작은 사진처럼 녹아 주변 조직으로 스며들고, 그 부위가 점차 탄회되면서 만들어진다. 가장 아래 큰 사진은 반점 끝 부분을 2mm정도 켜낸 모습이다. 여기서 배아 줄기는 숯처럼 타 있고, 주변도 진하게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식물학적 구조상 콩의 양쪽에 반점이 있거나 양쪽에 크랙이 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 p.11
로스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가열 방식, 회전수와 같은 로스터의 구조적인 문제 또는 열원의 종류(LPG,LNG,히터 등), 배기의 강약, 전도열의 비율 등이 있다. 둘째는 환경적인 요인인 기압, 온도, 습도, 풍속 등의 기상 여건이다. 셋째는 생두의 함수율이나 밀도와 같은 재료의 변수이다. 생두의 함수율은 간이로 측정하는 장비를 구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수확 연도나 색상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보통 12%이하인데, 불과 1%의 많고 적음도 로스팅의 속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같은 열량으로 로스팅하는 경우를 기준해 밝은 노랑이 만들어지는 시점이 평소보다 1분 이상 늦어진다면 십중팔구 수분이 많다고 볼 수 있다. --- p.17
로스팅 시간은 기기의 여건 또는 작업자의 의지에 따라 2분 여에 마칠 수도 있고 공장형처럼 15분까지 끌고갈 수도 있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시간은 접부채의 살 간격처럼 각 구간을 동일한 비율로 늘이거나 좁히는게 바람직하다. 이와 같은 이론을 적용하면 화력 조절의 미숙으로 3분정도에 밝은 노랑이 만들어졌다면 8분에 작업을 끝내는게 열량을 낮춰 10~12분까지 익히는 것보다 결과가 좋다. --- p.25
생두를 투입하고 변곡점을 지나 본격적으로 온도가 상승하는 5분까지의 프로파일이 로스팅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에는 이미 앞에서 정한 열량에 맞게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두는 게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간혹 변곡점을 맞추면 밝은 노랑의 시간대가 어긋나거나, 둘까지 맞추고 나면 이번에는 1차 파핑 시간이 맞지 않는 변덕스러운 기기도 있다. 한 배치 볶는 데 여러 차례 화력을 조절해야 가까스로 3대 구간 맞추기에 성공하는 경우 그 로스터가 합리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다루기 쉬운 로스터는 고정 화력으로 균일하게 가동해 1:15~1:30에 변곡점을 돌고, 4~5분에 밝은 노랑, 7~8분 1차 파핑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런 패턴을 보인다. 기기의 특성이나 생두의 함수율 또는 밀도, 기상 여건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고 3대 프로파일을 맞추는게 바로 표준화 기술의 핵심이다. --- p.27
보편적인 프로파일을 선택했다면 1차 파핑이 진행되는 시간의 드럼 내 공기 온도는 대략 185~195℃ 인데, 수분이라는 장애 요인이 절반 가까이 사라져 열량을 줄이지 않으면 과도하게 빨리 익어버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마이야르 반응이 시작되고 필수 성분들이 활성화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채우지 못한다. 반대로 열이 너무 낮으면 필수 성분이 극대화되지 못해 밋밋한 맛의 원두가 되고 만다. --- p.29
로스팅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이 배운 루트나 사고방식에 따라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두 부류로 나뉜다. 로스팅의 핵심 조건인 시간은 어떻게 하겠다는 능동적인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00분 볶겠다” 와 “00분에 볶아졌다” 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자의 경우 로스팅 전반에서 일어나는 결과를 예측하고 최적화의 레시피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만 빛을 발한다. --- p.39
예로부터 커피 볶음도를 나타내는 의사 소통의 기준은 색의 강약이다. 오늘날까지 방식은 그대로이며, 다만 나라마다 사용되는 표현만 약간 다른 정도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볶음도는 ‘light-cinnamon-medium-high-city-full city-french-italian’ 이다. 이 명칭이 만들어진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연관성이 거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다. 이중 상품성이 보장되는 등급은 라이트와 시나몬을 제외한 6단계이다. 그렇다면 식용과는 거리가 있는 이 두 등급이 8단계에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향미를 기준해 상품의 거래나 품질 관리 또는 정보의 교류를 위해서는 등급이 최소 8단계 정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 로스팅이 끝날 무렵에는 화학적 변화가 왕성해 30초만 더 볶아도 맛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일반 로스팅 시간대인 10~15분 사이에만 30초 텀이 10개나 존재하는 셈이다.
(중략)
향미를 우선해 8단계의 등급을 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색으로 나타내는 과정에서 시나몬이나 라이트 같은 엉뚱한 색이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원두의 색은 아직도 신뢰할 만한 최소한의 국제 표준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medium color” 는 서두에 언급한 “지적인 외모” 처럼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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