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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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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430g | 130*190*30mm
ISBN13 9791195823000
ISBN10 119582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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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 낮은 샌들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잿빛 도는 핑크빛 아코디언 주름 스커트를 입은 수미의 종아리는 조금 둥글고 통통했지만 뽀얗고 깨끗했다. 섬세한 아일릿으로 장식된 낙낙한 하얀 블라우스, 새끼손톱보다 작은 펜던트 목걸이를 한 목덜미도 마찬가지로 청결함이 느껴졌다. 펑크족으로 보일 정도까진 아니지만 약간 거친 느낌으로 징이 박힌 민정의 샌들은 조금 터프했는데, 짧은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길쭉한 맨다리도 자세히 보면 미끈한 게 아니라 온갖 흉터로 역시, 굉장히 터프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가장 터프한 건 그런 흉터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이크로 숏팬츠를 입는 민정 자체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상처투성이 다리를 보고 자주 싸움을 거는 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단지 그녀는 술을 마시면 쉽게 넘어질 뿐이었다. 많은 만취자가 그렇듯이.
--- p.15

읽고 삭제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상관없어. 한 번쯤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나는 두려웠어. 더 나빠지거나 돌이킬 수 없어질까봐. 그 흔한 생일 카드도 한 번 주지 못 했던 건 무엇을 써도 다 고백 같았기 때문이야. 생일 축하한다고,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흔히 하듯 써도 그 옆에 오빠 이름을 쓰면 바로 고백이 되어버 리는 것 같았어. 오빠는 내 이십 대의 전부였어. 나는 어제까지 내내 스무 살로 살다가 하루 만에 갑자기 스물아홉 살 마지막 날에 와 있는 기분이 들어. 피곤하다.
--- p.26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그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정말 궁금하고 싶지 않은데 이따금씩 그런 궁금증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어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비밀로 하고, 그러면서 말 한마디로 쉽게 나를 저쪽으로 치워버리는 것. 무슨 그 남자의 발 닦는 닦개처럼… 웰컴매트.
--- p.72

다행히 집이 코앞이라 간신히 그를 뿌리칠 수 있었어요. 내게는 목숨의 위협이었지만 어차피 그에게는 귀갓길의 가벼운 장난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바로 헐떡헐떡 집으로 달려가 울면서 아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고했어요. 나가서 그 미친놈을 패줄 거라 굳게 믿었어요. 그리고 경찰에 신고해주기를 기다렸죠. 그렇게 안 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데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지는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네가 밤늦게 다니니까 하나님이 벌을 주신 거다.
--- p.105

오늘은 다시 그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잘 살다가 갑자기 불행해지고, 문득 나에게 한 번쯤 사과하고 싶어졌으면 좋겠어요. 그가 아무것도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으면 해요. 길 가다 날 마주치면 몸 가릴 곳이 없어 몸 둘 바를 몰랐으면 해요. 그리고 나는, 몸 둘 데를 몰라 허둥대는 그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 싶어요. 마음이 치매 같아요.
--- p.158

어느 날 분을 참지 못한 그가 무릎을 꿇으라고 해서 나는 그렇게도 해봤어요. 정말 무릎을 꿇으면 가정이 지켜지는지 궁금했거든요. 지켜지긴 뭐가 지켜져요. 무릎만 꿇고 엎드리질 않아서 그랬나. 서너 시간을 그러고 있었더니 내 무릎 인대만 상하더군요. 가정은커녕 내 인대 하나도 지키지 못했는데.
--- p.222

잘 봐, 나는 너 때문에 죽는 거야, 이 장면을 너는 평생 기억하며 살아, 병신 같은 년이라고 비웃다가도 망할 귀신이 되어 저주를 내릴까봐 머뭇거려지겠지, 계속 그렇게 머뭇거리며 사는 거야, 욕을 할까 말까. 길을 걷는데 자꾸만 나를 닮은 여자가 스쳐가고, 그 여자들이 자꾸만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며 눈앞에 툭 툭 떨어지겠지, 그런데 그건 꿈이 아니라서 깨어날 수가 없어.
그렇게 그가 평생 곤란하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어렸던 날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나는 이런 전화를 받으며 또 살아가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라고.
--- p.243

옛사랑은 불현듯, 자주 쓰지 않는 가전제품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집 안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토마토를 갈아먹고 싶어졌을 때 떠올린다. 아, 믹서가 어딘가 있을 텐데, 하고. 여기 어딘가, 분명 여기쯤 어디, 둔 것 같다고. 그리고 잘 쓰고 다시 둔다. 잘 두었지만 어딘가로 금세 사라지고 만다. 오늘치의 삶 속에는 그 물건이 없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수미에게서 완벽한 가전제품이 되었음을 알았다. 내가 어떻게 이런 마음이 되었을까. 수미는 의아했다. 그 사람 때문에 울었던 밤이 얼마인데, 오늘은 까맣게 잊힌 가전제품. 일 년에 한두 번 쓰게 되는 때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물건에게서 마음이 떠난 채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물건도 스스로 기어코 알게 되고 마는 거겠지.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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